이야기 그림[이야기 그림 86] 교복과 엽서

2년 전 세상을 떠난 소년의 기일이었다. 음력설에 떠난 소년은 내 친구의 아들이고 급성 백혈병으로 수술 후 가족의 배웅 속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을 잃고 깊은 슬픔에 빠진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그렇게 우린 만났다. 아들이 우리를 만나게 해준 거라는 친구의 말에 나는 웃는 듯 울었다. 삶과 죽음 그리고 만남과 이별이라는 우리 인생의 역설을 관계를 통해 느낀다.

친구를 만나고 길에서 교복을 입은 소년만 마주쳐도 눈물이 났다. 그런 친구에게 ‘은재’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딸아이가 있다.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는 가끔 엄마를 서운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다른 아이들처럼 사춘기를 겪는 소녀가 나는 고맙다. 친구에게 엄마로서 느끼는 기쁨과 허전함을 동시에 안겨주는 그 아이가 있어 친구는 오늘도 고통을 딛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은재가 얼마 전, 용돈을 모아 고양이 간식을 선물했다. 나의 어린 고양이 ‘복만’에게 직접 그림을 그린 엽서까지 동봉해 보내왔다. 철없이 아름다운 내 고양이는 소녀의 정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열심히 간식을 먹고 기분이 좋다며 갸릉갸릉 노래한다.

나는 그 엽서를 내가 읽는 책마다 책갈피로 꽂아둔다. 의식한 적 없었는데 나는 이 엽서를 고이 모셔두고 있었던 거다. 예쁘고 고급스러운 책갈피도 많은데 나는 소녀의 이름이 적힌 엽서만 책갈피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 같다.

이 이름을 붙들고 살아가는 친구가 애틋해서 엽서를 가끔 만지작거린다.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소년 소녀들이 볕을 쬐는 병아리들처럼 보인다. 생명이 생명으로 이어지고 사랑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로 험한 세상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한 이름 모를 친구들. 그들이 살아갈 세상에 슬픔과 고통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바란다. 천재지변이나 생로병사는 어쩔 도리가 없겠지만 적어도 어른들이 지켜야 할 안전과 평화가 무엇인지 생각했으면 좋겠다. 이유가 명백한 죽음도 이렇게 슬픈데 원인도 모르고 책임지는 이도 없는 무수한 어린 생명의 죽음은 얼마나 더 가슴에 사무칠까?

천지 사방에 봄이 깃들어도 춥고 황망한 시간을 사는 부모가 아직도 길 위에서 울고 있다.


글・그림 | 고정순 어린이그림책 작가이자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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