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그림[이야기 그림 88] 5월이 오면

얼마 전 공영방송국에서 제작하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다. 방송을 위해 멀리서 촬영팀이 왔고 조명과 카메라 장비를 푸느라 집안이 온통 소란했다. 프로그램은 5월 18일에 맞춰 방송되는 프로그램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을 담았다. 촬영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인터뷰 도중 엉뚱한 생각을 했다.

나는 뚜렷한 생각이나 별다른 견해 없이 세상을 바라보던 사람이다. 책을 만드는 사람이 된 후 내가 확 변했으면 좋겠지만 그저 ‘생각’이란 걸 조금 하게 되었다는 사실 외에는 큰 변화를 겪지 못했다. 하지만 이전보다 조금 늘어난 그 ‘생각’이란 게 날 조금씩 변화시켰고 자꾸만 반복되는 참사를 보면서 나도 언젠가 영문도 모른 채 사라질 수 있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사고의 작은 틈으로 공포가 스몄고 개인의 노력만으로 온전히 지켜낼 수 있는 안전도 평화도 없다는 사실을 어렵게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 몸을 부풀리는 커다란 물음표는 사회적 책임과 사회안전망의 존재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당장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지닌 나의 부모조차도 그런 사람들에 해당됐다. (애석하게도 말이다)

사고가 끊이질 않는데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사회는 누가 만들었을까?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왜곡하는 사람들만 늘어가는 현상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나의 물음표는 오늘도 덩치만 부풀리고 있을 뿐이다.

나의 부모를 볼 때마다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들에게는 지켜주는 주체가 늘 부재했다는 사실이다. 죽고 사는 문제는 팔자소관이지 국가의 책임을 따져 물을 일이 아니라는 게 그들의 오래된 생각이다.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먹고 사는’ 급박함에 몰려 뒷전이 되어버린 안전과 책임이 이제는 더욱더 희미해졌으리라.

어쩌면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나도 한몫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촬영팀이 돌아가고 한산한 집에 앉아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문득, 나의 일상의 평화는 누가 지켜준 것인지 궁금했다. 온전히 내 힘으로 지켜왔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걸 보니 나름 양심은 있구나 싶다.


글・그림 | 고정순 어린이그림책 작가이자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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