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그림[이야기 그림 92] 여름, 오후 6시

나의 집은 준공 25년이 된 노후 주택이다. 사실 사는 데 큰 불편이 없어 가끔 이 사실을 잊는다. 서울에 살 때보다 오히려 쾌적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하루도 같은 모습을 보인 적 없는 드넓은 하늘과 초록으로 무성한 산과 들 덕분이다.

하지만 가끔 오래된 공동주택다운(?)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공동현관문 센서등이 자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동으로 점등하지 못하니 센서등이 아닐 것이다. 오후 6시면(하절기 기준) 경비원이 직접 스위치를 올린다.

동마다 직접 점등을 하는 행위가 번잡할 수도 있지만, 나는 철없이 운치를 느낀다.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을 마중하는 느낌이며 아직 일을 마치지 못한 사람들의 앞길을 밝히는 다정함이 느껴진다. 물론 일일이 점등하는 사람의 수고도 포함해서 말이다.

입추가 시작되고 사람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곧 가을이다’라고 외쳤다. 절기가 맞을 리 없는 기후변화의 격변 속에 사는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 같은 외침이다. 미세한 변화가 있긴 하지만 여전히 지난여름과 다른 이상고온 속에서 가을을 기다린다. 곳곳에서 더위에 쓰러지는 사람들의 사연이 뉴스를 통해 전해지고 우리의 지난 시간을 반성할 틈도 없이 우린 날마다 과오를 범하며 산다.

아이들이 보는 환경 책을 만들고 싶다는 편집자 친구에게, 아무 잘못 없는 아이들에게 환경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게 옳은 일인지 다시 생각하라고 말했다. 내가 아직도 아이들을 위한 환경 책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다. 어른으로 부끄럽고 작가로 괴롭다.

내가 그린 그림이 들어간 티셔츠를 입은 소년을 보았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막기 위해 만들었지만 주변 사람 중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습관적인 허무가 아이들에게 어떤 핑계로 비칠지 나는 묻고 싶다.


글・그림 | 고정순 어린이그림책 작가이자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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