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최예용 소장 "환경운동 자본주의 너머를 꿈꾸자"

최예용 소장 Ⓒ함께사는길 이성수


1986년부터 반공해 운동을 시작한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이하 직책 생략)은 올해로 환경운동 37년 차에 이른 우리나라 환경 운동사의 산증인이다. 그는 자타공인 대형 액션과 퍼포먼스 전문가이기도 하다. 기획부터 진행, 사진 촬영(기록) 등 못 하는 게 없다. 이 때문에 지난 10월 16일 울산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저지 액션을 함께 한 울산환경운동연합 이상범 처장은 “삼국지 관우와 장비를 합친 지장(智將)이자 맹장(猛將) 같은 운동가”라고 그를 평가한다. 최예용이 액션과 퍼포먼스를 중시하는 것은 복잡한 환경 문제를 좀 더 쉽게 알리기 위해서다. 환경운동연합의 지난 30년을 보면 1994년 현대그룹의 시베리아 벌목 반대운동, 1998년 동강댐 반대운동, 2007년 삼성 허베이 스피릿호 원유 유출 사건 등 그가 기획한 활동이 사진으로 여러 역사에 기록돼 있다. 그는 사진 한 장에 해당 이슈의 핵심이 드러나게 한다. 삼성 허베이 스피릿호 원유 유출 사건 땐 기름에 뒤덮인 바닷새와 그 새를 바라보는 최예용의 슬픈 눈망울을 통해 이 사건의 참상을 알렸다.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의 저자 롭 닉슨은 구조화된 비가시적 폭력을 ‘느린 폭력’으로 규정하면서 이 문제 해결에 작가, 활동가 역할을 강조한다. 느린 폭력 특성의 환경 문제를 상징적으로 폭력이라고 표현하는 퍼포먼스와 액션은 수용자 관점에서도 중요할 수밖에 없다. 최예용은 이 점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2000년대 초반부터 환경 보건 분야에 집중해 환경보건학 박사학위를 딴 ‘스칼라 액티비스트(Scholar Activist)’, 즉 ‘전문성을 지닌 활동가’다. 지난 정부 시절인 2018년 가습기살균제사건 및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이하 사참위)에서 차관급인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2020년 10월 가습기살균제 참사 진상 규명을 방해하는 환경부와 국회에 반발해 사직해서 다시 피해자 관점의 현장 운동에 집중하는 게 그였다. 얼핏 최예용은 항상 주목받는 화려한 운동만 해왔던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사회적 주목보다 운동을 위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처절하게 버티는 시기가 더 길었다. 이런 최예용이 37년 동안 환경운동에 매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핵발전소 반대, 공해추방운동의 특징

1965년생인 최예용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사셨던 전북 김제를 자기 고향이라고 말한다. 유년 시절 치기 어린 짓궂은 장난도 곧잘 했던 그는 1985년 서울대 산업공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의 극에 달한 폭압은 시대적 울분과 이에 저항한 열혈 학생운동권을 만들어 냈다. 최예용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친구인 황상규(전 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현 ESG 강소기업센터장)의 소개로 당시 반공해 운동 청년 모임인 반공해운동협의회(반공협)에 참여했다. 이 조직의 상당수 청년은 최예용처럼 이후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공청협), 공해추방운동연합(공추련)을 거쳐 환경운동연합에서 환경운동을 이어갔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집안의 첫째였던 최예용에게 부모님의 기대는 컸다. 부모님이 볼 때 남들과 달리 엉뚱한 길(?)로 빠진 큰아들이 마뜩잖았다. 최예용에게 자신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준 게 그의 부친이었다. 그의 부친은 애써 모아둔 최예용의 공해 관련 자료를 두 번씩이나 불 지르기도 했고, 공추련 사무실로 직접 찾아가 격한 항의를 하기도 했다. 최예용이 졸업과 군 제대 후(그는 방위병으로 근무하면서 공추련으로 퇴근해서 일할 정도였다) 돈 안 되는 공추련에서 상근할 때 그의 부친은 “서울대 나온 첫째 아들은 지금 어디 다니냐?”라는 주변 지인의 물음에 “환경처(환경부 전신) 다녀요.”라며 말끝을 흐렸다고 한다. 그랬던 그의 부친은 최예용이 1993년 울산환경운동연합으로 파견을 가자 첫째 아들 대신 반핵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또 신문에 환경 관련 내용을 오려서 고무줄로 돌돌 말아 모아뒀다가 첫째 아들에게 “읽어봐라.”라며 툭 던져주기도 했다. 아들에게 미안했던 아버지의 마음이랄까.

사회 변혁을 위한 학습에 목말랐던 최예용은 반공해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이공계열의 전문성을 살려서 사회에 기여하고 또 사회 변혁까지도 할 수 있다는 게 부담이 덜했다고 한다. 반공해 운동 그룹과 기존 학생운동은 둘 다 급진적 변혁을 꿈꾸고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사회주의를 이상향으로 동경하던 점이 비슷했다. 반면 핵발전소 문제에 대해선 인식차가 있었다. 당시 학생운동의 주류는 반핵·반미를 주창했다. 그들에게 반핵은 핵무기였다. 반공해 운동 그룹은 핵발전소 문제를 더 크게 봤다. 1986년 4월 구 소련(현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 사고 영향도 컸다. 이런 상황에서 최예용은 ‘핵발전소 있는 사회주의와 핵발전소 없는 자본주의 중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토론했다. 그는 “굉장히 고민스러웠다. 아무리 제도로서 사회주의가 이상적이어도 핵발전소가 없는 사회가 더 안전하고 좋은 사회 아니냐는 식의 토론을 했던 것 같다.”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그가 “이것이 바로 당시 공해추방운동의 특징”이라고 말할 정도로 당시 핵발전소 반대운동은 핵심이었다. 

환경운동연합 초창기부터 최예용은 멀티 운동가였다. 단체 재정 사업을 위해 재생 휴지 판매에 나서기도 했고, 1990년대 중후반엔 총무팀과 기획사업팀을 맡기도 했다. 앞서 1990년대 초반엔 그린피스 전문 액션팀처럼 건물 외벽 현수막 시위 등 강렬한 액션을 전담한 ‘생명의 빛’ 활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현장 운동을 강조한다. 환경운동연합 바다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그는 지역 조직과 국제단체와 연계 활동을 이어왔다. “보트 타고 액션할 때 희열 같은 게 있다. 이게 운동이다.”라고 느낀다는 게 그의 말이다. 국내 환경단체, 동물단체 중에서 제일 처음 고래 보호 운동에 나선 것이 그와 바다위원회였다. 고래 보호 관련 국제적 흐름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 10년 넘게 해양 투기 반대운동의 전면에 나서 제도의 조기 시행을 이끌어냈다. 최예용의 운동적 삶 속에서 액션만 있었던 건 아니다. 2003년 시민환경연구소에서 그는 환경보건 전문가들과 함께 중앙일보에 ‘환경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 연재를 진행했다. 2004년엔 같은 제목의 책으로 냈다. 2016~2017년엔 주간경향에 ‘최예용의 환경보건 이야기’ 시리즈도 연재했다.


좀 더 레디컬한 환경운동이 필요하다

지난 9월 18일 후쿠시마오염수 투기 중단을 위한 일본제품 불매운동 기자회견 중 일본 맥주를 핵 드럼통에 쏟아붓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최예용 소장(맨오른쪽) Ⓒ함께사는길 이성수


2010년 환경보건시민센터를 창립한 최예용은 피해자 운동 관점에서 석면, 미세먼지, 전자파, 가습기살균제 문제 등에 집중했다. 석면과 관련해 그는 독일, 일본의 석면 산업이 한국을 거쳐 인도네시아 등 개발도상국가로 이동하는 현장을 직접 확인했다. 그는 현장을 기반해 유니크한 데이터를 만들어 내고 해당 이슈에 천착하면서 세상을 깊게 분석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이 그를 지금까지 환경운동에 매진하게 했던 요인 중 하나다. 석면 문제도 마찬가지다. 국내외 석면 관련 현장 데이터를 통해 최예용은 “선진국의 공해산업이 자국의 높은 수준의 환경규제를 피해 환경규제가 없거나 낮은 수준의 개발도상국가로 이전한다.”라는 ‘오염 도피처 가설’을 입증했다(최예용. 2013. ‘아시아에서 석면산업의 국가 간 이동’. 서울대학교 보건환경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학술과 운동 측면에서 의미 있는 성과였고, 이를 기반으로 최예용은 석면 관련 국제연대를 조직했다.

가습기살균제 문제는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명예교수와 같은 전문가의 전문성과 최예용과 피해자 그룹의 운동성이 결합한 사례다. 이런 활동이 있었기에 대통령이 직접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게 만들었다. 또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 제정에 따라 접수된 7800여 명의 피해자 중 5100여 명 가까이 일부나마 피해구제를 받게 했다. 화학물질 관련 여러 법률도 제·개정될 수 있었다. 그는 “(피해의) 질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양적 (피해) 크기가 엄청나기 때문”에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찾기에 집중했다. 그는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 회사의 판매량 등을 고려할 때 사망자가 2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지만, 현재 1800여 명만 확인됐다.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절대 녹록지 않았다. 그런데도 안타까움이 크게 남았다. 특히 최예용은 인력과 자원이 있었던 사참위 활동 기간 단순 피해구제 차원을 넘어 실질적인 배·보상 수준에 이르게 하는 전략을 마련하지 못한 부분을 가장 큰 아쉬운 점으로 꼽고 있다. 피해자 지원을 통해 “운동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었다.”라는 게 그였지만, 일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그룹은 제도 미비 등의 책임을 최예용에게 돌리면서 그를 고발하기도 했다. 그런 게 네다섯 건이다. 그는 갑갑한 피해자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씁쓸한 측면들이 있다.”라고 말한다. 최예용은 “피해자를 제대로 찾아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제 사건이 된다.”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또 그는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일본 미나마타병을 계기로 국제 수은 협약이 만들어진 것처럼 생활화학 제품의 위험성에 대한 국제협약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최근 최예용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환경운동연합 30년 기념 토론회에서 나온 ‘우리나라 환경운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마일드해졌다.’라는 평가 때문이었다. 성장 담론과 자본주의라는 제도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안주했다는 지적이다. 돌이켜 보면 최예용 본인도 환경 보건 현안에 집중하면서 정작 자본주의 비판을 담아내지 못했기에 그에게 “뼈아픈 비판”이었다. 그는 “내가 지금까지도 계속 현장에 있는 몇 안 되는 선배인데, 그런 점에서는 나한테도 책임이 없지 않을 거다. 그렇기에 고민이 크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환경운동연합 내에 좀 더 레디컬한 운동 관점을 실천할 대학생 그룹, 청년 그룹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추상적인 수준에서 벗어나 더 근본적인 목표와 구체적 실천 전략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환경운동을 통해 자본주의 너머의 세상을 꿈꾸게 하자.’라는 것도 그의 강조점이다.

국가, 자본, 산업, 인류 중심주의가 강력한 지배 담론을 형성하고 있는 현실에서 자본주의 너머의 꿈은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체제 전환, 생태 전환의 꿈은 최예용처럼 이 꿈을 이루려는 이들의 열정과 구체적 실천 전략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글 | 이철재 에코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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