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그림[이야기 그림 95] 순자 이모

나의 어머니는 7남매 중 가운데 딸이었다.

농부였던 부모 밑에서 자라 첫걸음마도 논길에서 뗐다고 과장할 정도로 농사와 가까운 사람이다. 형제 모두 밭일보다 학교 공부를 하고 싶어 했기에 소학교 꼴등을 도맡아 하던 어머니가 농사일을 돕는 일손이 되었다. 

어머니에게는 순자라는 언니가 있고 우린 그녀를 순자 이모라고 부른다. 순자 이모는 엄마의 형제 중 가장 고단한 생을 보냈고 그로 인해 형성된 억척같은 성격이 그녀를 더욱 성마르게 보이게 했다. 유난히 돈 욕심이 많고 샘이 많았던 순자 이모는 늘 엄마 몫을 탐하는 언니였고 그런 언니 덕에 엄마에게 순자 이모는 언제나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밭일을 도맡아 하던 어린 시절 나의 어머니 눈에 공부 핑계를 대던 순자 이모는 얄밉기만 한 사람이었다. 성인이 되어 각자 가정을 꾸린 뒤에도 그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포구가 있던 마을에서 오락실이 도산하고 서울 영등포로 이사 온 후 나의 부모님은 채소도매업을 하는 순자 이모네서 상회 일을 도왔다. 아마도 이때가 두 자매 사이에 깊은 골을 남긴 시절이 아닐까 싶다.

자애롭고 너그럽기가 부처님 부럽지 않은 나의 어머니는 이상하게 순자 이모에게만은 박했다.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늘 과하다 싶을 정도로 순자 이모를 미워했다. 우리 가족에게 작은 상회가 생긴 날 간판을 보고 한참 웃었다. 우리 상회는 ‘한국상회’라는 간판을 달았고 순자 이모네는 ‘대한상회’였다, 경쟁심이 느껴지는 작명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어머니는 ‘대한’보다 더 넓은 세상이 ‘한국’이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그뿐 아니다. 순자 이모네 소파가 생기면 우리 집에는 더 큰 소파가 들어왔고 늘 비슷한 생김의 가구와 옷가지가 경쟁하듯 생겨났다.

순자 이모를 경쟁하듯 미워했던 이유는 장사 일을 알려주던 순자 이모에게 모진 대우를 받았던 아버지 때문이다. 추운 겨울날 아버지에게 찬밥 한 술 먹이고 무거운 짐을 들게 했다는 게 어머니 설움의 핵심이다.


파주에 추위가 몰려온다.

나 외에 다른 생명체의 안녕을 가늠하기 어려운 계절이 바로 겨울이다. 한 발 떨어져 생각하면 짐작할 수 있는 마음이나 배려가 추운 겨울에는 쉽게 얼어붙는다. 

나도 순자 이모처럼 겨울을 나고 있지 않은지 되묻게 된다. 


글・그림 | 고정순 어린이그림책 작가이자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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