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가 천천히 산비탈을 내려왔다.
“내가 좋아하는 장소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소개하면 기분 좋아요.” 운전대를 잡은 J작가가 웃으며 말했다. 종일 운전하고 박물관 소개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싫은 기색 하나 없는 그를 보며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사람이란 보기 드물게 선한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곧잘 쓰는 표현이다. 상대적으로 내가 이기적이고 모난 사람이라 그렇다.
바쁜 일정을 마치고 모처럼 휴식의 시간이 찾아왔다. 특별히 사교모임이 있거나 특별하게 취미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동료작가들과 동행한 짧은 여행이 처음엔 어색했다.
우리가 찾은 곳은 건축을 사랑하는 J작가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산속에 있는 박물관은 건물 그 자체가 하나의 건축물이자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작품으로 이뤄졌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오가며 우리는 안내자의 설명을 들었다. 공간이 주는 의미와 다양한 건축 용어를 들으며 건축은 산책과 사색을 통해 음미하는 공간의 예술임은 느꼈다.
늘 이곳저곳으로, 지금 해야 할 일과 다음 할 일을 생각하며 공간이 주는 느낌을 감상할 여유 없이 움직이던 나에게 이 짧은 여행은 처음 기대보다 색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내가 만든 책을 사람들은 어떻게 감상할지, 순간 궁금했다. 내가 지금 공간과 공간 사이를 이동하며 느끼는 감정과 비슷할까? 누군가를 감상하게 만들어야 하는 직업적 속성과는 무관하게 나는 그저 마감과 마감 사이를 오가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하루 동안 우리의 안내자가 되어준 그가 우리에게 들려준 마지막 이야기가 오래 남는다.
“학생 때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했어요. 사서의 역할을 기대했는데 아니었어요. 내가 맡은 일은 지하 서고에서 낡은 책을 골라내는 일이었거든요. 어느 노교수님이 책을 기증하셔서 도서관을 다시 정리해야만 했거든요. 지하 서고에서 한 달 넘도록 낡은 책을 골라냈어요. 기준은 그냥 낡아 보이는 책을 책장에서 빼내는 거예요. 그런데 신기했어요. 서고 문을 열면 책들이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것 같았어요. 마치 사람처럼 긴 잠을 자는 느낌이 들었어요. 내가 툭, 건드리면 긴 잠에서 깨어나는 것 같았거든요.”
산비탈을 타고 천천히 내려오면서 산이 어둠에 잠기는 것을 보며 그가 지하 서고에서 보았을 어둠을 상상했다. 때로는 멈추고 잠들고 사라지는 것은 생명이 없는 사물이나 공간에도 일어나는 자연현상일까? 12월이 1월로 흐르면서 잠시 떠났던 여행처럼 ‘쉼’이 필요하겠다.
낯선 시간의 산책자가 되어 공간과 공간 사이를 천천히 걷고 싶다.
*‘낯선 시간의 산책자’는 갤러리 사진전 전시 명입니다.
글・사진 / 고정순 어린이그림책 작가이자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