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하는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것. 이게 이 책의 부제야. 1990년생의 기후활동가이자 조직가인 대니얼 셰럴은, 소멸하는 지구에서 무엇을 했는지, 그 일이 얼마나 진이 빠지는 종류의 일이었는지 편지를 쓰고 있어. 미래의 자신의 아이에게. 뜨겁고 묵직한 편집 모음집의 첫 장 제목은 ‘편지’야. 나는 시작하자마자 이 다정한 제목을 원망했지. 충격적인 첫 문장 때문에. “2018년 4월 14일 데이비드 버켈이라는 민권 변호사가 프로스펙트 공원에서 분신자살을 했어.” 사건은 비극적이고, 사건 이후의 상황들은 절망적이더라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동네 주민이 원 모양 재로 남은 시체를 발견해서 신고했고,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하다’는 내용의 유서도 발견됐는데, 화석연료로 인한 요절이라는 내용이었다지. ‘우리가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 짓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는 그의 유서에도 불구하고, 공원은 다시 북적거렸고, 곳곳에서 야유회가 열렸어. 나는 궁금했지. 우리는 정말 특별히 잔혹한 종족인 걸까. 그런데 대니얼 셰럴은 바로 그 무렵, 이 편지를 쓰게 됐다고 해. 우리가 써볼 전략 따위 없다는 무력감을 떨치려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는 거지. 미래의 누군가를 상정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바닥을 짚고 다시 일어날 수 있어. 사실 세상 모든 일에 ‘너’라는 존재 그 이상의 명분은 없지. 대니얼 셰럴은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서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집회를 벌였고, 2018년에는 기후정의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뉴욕주 의회의사당에서 연좌농성을 했어. 그리고 버펄로에서 열린 환경 회의에 참가 중이었을 때 트럼프가 파리기후협정에서 탈퇴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봤다고 해. 선의를 가지고 헌신하는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끊임 없는 패배의 현장으로 내몰리곤 하지. 그들은 세상과도 싸워야 하고, 언제나 세상에 지는 자기 자신과도 싸워야 해. 대니얼 셰럴 뿐만 아니라 많은 활동가들이 과도한 업무와 자기 일이 주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상담과 치료를 받거나 현장과의 적절한 거리 두기를 시도하거든. 대니얼 셰럴이 통과한 성찰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습관적으로 주저앉고, 끊임없이 묵시록적인 핑계를 대는 데 최선을 다하는 나 같은 사람은 종종 부끄러워지지. “전망이 이렇게 어두운데 어떻게 ‘그 문제’와 계속 싸워나가세요?” 어떤 소설가가 이렇게 물었다는데, 그 대답은 마치 내게 하는 이야기 같아. ‘그 문제’는 핵전쟁처럼 이분법적이지 않고, 현재 진행 중인 문제이며, 피할 수 없다고 해도 우리가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하는 노력이 미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그때 그는 자기가 쓰는 편지 얘기를 하지 못했던 걸 아쉬워 해. “이 편지는 어떤가요, 라고 물었어야 했어. 당신 생각에 이 편지도 그 싸움에 해당하나요?” 이렇게 묻는 것만으로도 대답이 되었을 거야. 왜냐하면 그가 싸우고 있는 그 문제는 그의 문제만의 아니라, 질문을 던진 소설가의 문제이고, 우리의 문제니까 말이지. 어떤 문제는 오늘부터 당장 세금을 올리겠다는 선언으로도 해결될 수 있지만, 세상의 많은 문제들은 오늘의 일을 내일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늘 해결과 미해결 사이 어디쯤에 서 있기도 하니까. 우리 종족의 특별한 불완전성이라고 해두자.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너’라는 존재가 ‘너’에게도 있을까. 세계가 소멸해가는 가운데, 너 역시도 너의 성공과 실패, 너의 헌신과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할 누군가가 곁에 있기를 바라. 앞서 편지를 쓴 사람들은 소멸의 어느 단계를 상상하면서 무겁게 펜을 들었을지언정, 너는 소멸이 아니라 회복하는 미래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을 살길 바라. 이제 와서 말을 좀 바꾸자면, 대니얼 셰럴의 편지는 미래 그 자체에게 보내는 것일지도 몰라. 나는 그의 말에 좀 기대어 가려고 해. “그게 뭐든,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 네게 편지를 쓰면서 현실을 살게 됐고 눈을 깜빡이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그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됐단다. (…) 궁극적으로는 나를 나의 세계에 데려온 것이 너라는 것.” 우리 모두 미래라는 너를 짚고 서 있어.
대니얼 셰럴 지음, 허형은 옮김, 창비
소멸하는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것. 이게 이 책의 부제야. 1990년생의 기후활동가이자 조직가인 대니얼 셰럴은, 소멸하는 지구에서 무엇을 했는지, 그 일이 얼마나 진이 빠지는 종류의 일이었는지 편지를 쓰고 있어. 미래의 자신의 아이에게. 뜨겁고 묵직한 편집 모음집의 첫 장 제목은 ‘편지’야. 나는 시작하자마자 이 다정한 제목을 원망했지. 충격적인 첫 문장 때문에. “2018년 4월 14일 데이비드 버켈이라는 민권 변호사가 프로스펙트 공원에서 분신자살을 했어.” 사건은 비극적이고, 사건 이후의 상황들은 절망적이더라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동네 주민이 원 모양 재로 남은 시체를 발견해서 신고했고,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하다’는 내용의 유서도 발견됐는데, 화석연료로 인한 요절이라는 내용이었다지. ‘우리가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 짓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는 그의 유서에도 불구하고, 공원은 다시 북적거렸고, 곳곳에서 야유회가 열렸어. 나는 궁금했지. 우리는 정말 특별히 잔혹한 종족인 걸까. 그런데 대니얼 셰럴은 바로 그 무렵, 이 편지를 쓰게 됐다고 해. 우리가 써볼 전략 따위 없다는 무력감을 떨치려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는 거지. 미래의 누군가를 상정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바닥을 짚고 다시 일어날 수 있어. 사실 세상 모든 일에 ‘너’라는 존재 그 이상의 명분은 없지. 대니얼 셰럴은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서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집회를 벌였고, 2018년에는 기후정의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뉴욕주 의회의사당에서 연좌농성을 했어. 그리고 버펄로에서 열린 환경 회의에 참가 중이었을 때 트럼프가 파리기후협정에서 탈퇴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봤다고 해. 선의를 가지고 헌신하는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끊임 없는 패배의 현장으로 내몰리곤 하지. 그들은 세상과도 싸워야 하고, 언제나 세상에 지는 자기 자신과도 싸워야 해. 대니얼 셰럴 뿐만 아니라 많은 활동가들이 과도한 업무와 자기 일이 주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상담과 치료를 받거나 현장과의 적절한 거리 두기를 시도하거든. 대니얼 셰럴이 통과한 성찰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습관적으로 주저앉고, 끊임없이 묵시록적인 핑계를 대는 데 최선을 다하는 나 같은 사람은 종종 부끄러워지지. “전망이 이렇게 어두운데 어떻게 ‘그 문제’와 계속 싸워나가세요?” 어떤 소설가가 이렇게 물었다는데, 그 대답은 마치 내게 하는 이야기 같아. ‘그 문제’는 핵전쟁처럼 이분법적이지 않고, 현재 진행 중인 문제이며, 피할 수 없다고 해도 우리가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하는 노력이 미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그때 그는 자기가 쓰는 편지 얘기를 하지 못했던 걸 아쉬워 해. “이 편지는 어떤가요, 라고 물었어야 했어. 당신 생각에 이 편지도 그 싸움에 해당하나요?” 이렇게 묻는 것만으로도 대답이 되었을 거야. 왜냐하면 그가 싸우고 있는 그 문제는 그의 문제만의 아니라, 질문을 던진 소설가의 문제이고, 우리의 문제니까 말이지. 어떤 문제는 오늘부터 당장 세금을 올리겠다는 선언으로도 해결될 수 있지만, 세상의 많은 문제들은 오늘의 일을 내일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늘 해결과 미해결 사이 어디쯤에 서 있기도 하니까. 우리 종족의 특별한 불완전성이라고 해두자.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너’라는 존재가 ‘너’에게도 있을까. 세계가 소멸해가는 가운데, 너 역시도 너의 성공과 실패, 너의 헌신과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할 누군가가 곁에 있기를 바라. 앞서 편지를 쓴 사람들은 소멸의 어느 단계를 상상하면서 무겁게 펜을 들었을지언정, 너는 소멸이 아니라 회복하는 미래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을 살길 바라. 이제 와서 말을 좀 바꾸자면, 대니얼 셰럴의 편지는 미래 그 자체에게 보내는 것일지도 몰라. 나는 그의 말에 좀 기대어 가려고 해. “그게 뭐든,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 네게 편지를 쓰면서 현실을 살게 됐고 눈을 깜빡이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그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됐단다. (…) 궁극적으로는 나를 나의 세계에 데려온 것이 너라는 것.” 우리 모두 미래라는 너를 짚고 서 있어.
| 조은영 무가지로 발행되는 서평 전문 잡지 『텍스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