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이 스크랜턴 지음, 안규남 옮김, 시프
2014년 9월 어느 일요일 아침, 30만 명의 시민들이 뉴욕 센트럴파크 서쪽에 운집했다. 1500개 이상의 단체들이 열심히 조직한 이 행사는 ‘역사상 최대의 기후 행진’이 될 것이라고 예고돼 있었다. 같은 시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요청으로 100여 명의 국가수반들이 참여하는 유엔기후정상회의가 열렸다. 일반 시민과 국가 정상이 각기 무대는 다르지만, 목적은 하나였다.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상이 구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지만, 두 행사에 대해서 이런 평가도 있다. 전자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열정으로 가득 찬 광란의 파티, 활동가를 주제로 한 거리 축제, 트위터의 해시태그 캠페인의 유사 현실판…. 후자에 대해서는, 전자의 거짓 묘약조차도 없는 관료적 마취제….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의 이러한 서술은, 비판이나 비난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책은 기후변화가 매우 거대한 문제이며, 누구에게도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매우 냉정한 어조로 서술하고 있다. 작가 로이 스크랜턴에게는 이라크 참전용사였던 이력이 있다. 그의 그러한 이력은 자신의 존재론을 정립하는 것 외에, 우리에게도 꽤 인상적인 삶의 태도를 시사한다. “군인으로서의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죽음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했다. (…) 인간의 마음은 원래 자신의 종말이라는 생각에 저항한다. 마찬가지로 문명의 역사도 재앙을 향해 맹목적으로 행진해왔다. 인간들은 내일도 오늘과 비슷할 것이라고 믿도록 생겨 먹었기 때문이다. (…) 죽음의 불가피성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는 힘든 임무에 더 빨리 착수할 수 있다.” 전장의 복판에 선 군인처럼 우리는 죽음의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그것의 원인은 물론 탄소 연료를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책에서는 이것을 ‘좀비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시스템으로부터 이탈해서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조금 덜 파괴적인 방식의 삶의 태도를 궁리해 볼 수는 있을 텐데,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라는 책 제목은 제법 흥미
로운 제안이다. 죽음을 배우는 일은, 역설적으로 삶의 태도를 새롭게 만드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 흥미로움은 시작된다. 그리고 매우 통시적이고 지구적 관점을 요구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를 사는 중이라는 것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2000년대에 생물학자인 유진 슈퇴르머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크뤼첸이 제안하여 만들어진 인류세는 새로운 지질 시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농업을 시작한 1만2000년 전 무렵을 그 시작점으로 삼을지, 1800년대 산업혁명 이후라고 해야 할지, 1945년 최초의 원자폭탄과 함께 시작된 시기라고 해야 할지, 분명하지 않다. 어느 시점이든, 지구의 역사나 지질 시대의 분류를 놓고 보면 미미한 차이다. 인류세의 기준은 인류가 지구환경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할 무렵이 언제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세는 “언제 시작되었건 간에, 인류세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라는 것이 가장 명료한 정의다. 물론 여기에는 “지구온난화에 의한 변화가 수백년 정도가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전 세계의 기후와 생물다양성, 나아가 지질 구조 자체에까지 영향을 줄 것이라는 증거”로 가득 차 있다는 비극적인 현실인식이 뒷받침된 통시적인 네이밍이기도 하다. 마치 타나토스를 죽음의 상징이라고 읽듯이, 지금 이곳 당신과 나의 시대인 인류세는 죽음으로의 행진이라는, 상징의 수준까지도 가지 못하는 아주 아픈 사실이 담겨져 있다.
자연 이상으로 지구환경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인류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우리는 지금 죽음으로 간다. 어떤 죽음으로 갈지는 어떻게 사는지에 달렸다.
글 | 조은영 무가지로 발행되는 서평 전문 잡지 『텍스트』 기자
로이 스크랜턴 지음, 안규남 옮김, 시프
2014년 9월 어느 일요일 아침, 30만 명의 시민들이 뉴욕 센트럴파크 서쪽에 운집했다. 1500개 이상의 단체들이 열심히 조직한 이 행사는 ‘역사상 최대의 기후 행진’이 될 것이라고 예고돼 있었다. 같은 시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요청으로 100여 명의 국가수반들이 참여하는 유엔기후정상회의가 열렸다. 일반 시민과 국가 정상이 각기 무대는 다르지만, 목적은 하나였다.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상이 구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지만, 두 행사에 대해서 이런 평가도 있다. 전자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열정으로 가득 찬 광란의 파티, 활동가를 주제로 한 거리 축제, 트위터의 해시태그 캠페인의 유사 현실판…. 후자에 대해서는, 전자의 거짓 묘약조차도 없는 관료적 마취제….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의 이러한 서술은, 비판이나 비난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책은 기후변화가 매우 거대한 문제이며, 누구에게도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매우 냉정한 어조로 서술하고 있다. 작가 로이 스크랜턴에게는 이라크 참전용사였던 이력이 있다. 그의 그러한 이력은 자신의 존재론을 정립하는 것 외에, 우리에게도 꽤 인상적인 삶의 태도를 시사한다. “군인으로서의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죽음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했다. (…) 인간의 마음은 원래 자신의 종말이라는 생각에 저항한다. 마찬가지로 문명의 역사도 재앙을 향해 맹목적으로 행진해왔다. 인간들은 내일도 오늘과 비슷할 것이라고 믿도록 생겨 먹었기 때문이다. (…) 죽음의 불가피성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는 힘든 임무에 더 빨리 착수할 수 있다.” 전장의 복판에 선 군인처럼 우리는 죽음의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그것의 원인은 물론 탄소 연료를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책에서는 이것을 ‘좀비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시스템으로부터 이탈해서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조금 덜 파괴적인 방식의 삶의 태도를 궁리해 볼 수는 있을 텐데,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라는 책 제목은 제법 흥미
로운 제안이다. 죽음을 배우는 일은, 역설적으로 삶의 태도를 새롭게 만드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 흥미로움은 시작된다. 그리고 매우 통시적이고 지구적 관점을 요구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를 사는 중이라는 것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2000년대에 생물학자인 유진 슈퇴르머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크뤼첸이 제안하여 만들어진 인류세는 새로운 지질 시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농업을 시작한 1만2000년 전 무렵을 그 시작점으로 삼을지, 1800년대 산업혁명 이후라고 해야 할지, 1945년 최초의 원자폭탄과 함께 시작된 시기라고 해야 할지, 분명하지 않다. 어느 시점이든, 지구의 역사나 지질 시대의 분류를 놓고 보면 미미한 차이다. 인류세의 기준은 인류가 지구환경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할 무렵이 언제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세는 “언제 시작되었건 간에, 인류세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라는 것이 가장 명료한 정의다. 물론 여기에는 “지구온난화에 의한 변화가 수백년 정도가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전 세계의 기후와 생물다양성, 나아가 지질 구조 자체에까지 영향을 줄 것이라는 증거”로 가득 차 있다는 비극적인 현실인식이 뒷받침된 통시적인 네이밍이기도 하다. 마치 타나토스를 죽음의 상징이라고 읽듯이, 지금 이곳 당신과 나의 시대인 인류세는 죽음으로의 행진이라는, 상징의 수준까지도 가지 못하는 아주 아픈 사실이 담겨져 있다.
자연 이상으로 지구환경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인류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우리는 지금 죽음으로 간다. 어떤 죽음으로 갈지는 어떻게 사는지에 달렸다.
글 | 조은영 무가지로 발행되는 서평 전문 잡지 『텍스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