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팔순 맹순 씨와 12살 이준이의 탐조레더

손 편지를 받아본 게 언제였던가 기억하시나요? 규격화된 인쇄 글씨가 아닌 조금은 삐뚤고 예쁘지 않아도 그 사람의 흔적이 묻어있는 손 편지 한 통 받았을 때, 그 기분. 그 편지에는 오롯이 나만을 생각한 마음이 담겨있고, 한 글자 한 글자 틀리지 않기 위한 정성이 묻어있기에 쉽게 썼다 지울 수 있는 이메일과 문자와는 또 다른 감동을 느끼셨을 겁니다.



지난 2월부터 수원에 사는 팔순 맹순 씨와 부천에 있는 12살 이준이가 이런 정성 가득한 손 편지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할머니와 손주의 관계도 아니고, 글씨 공부를 위한 편지 주고받는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이들의 편지는 희한하게도 ‘새’에 관한 것입니다. 비록 우편이 아닌 온라인(페이스북에 손편지를 올리면 그 편지를 보고 그 곳에 다시 답장을 하는 형식)상으로 편지를 주고받고 있지만, 직접 선 하나, 점 하나 정성 들여 그린 새 그림 밑에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이 새는 무슨 새인지, 어디서 만났는지, 할머니는(이준이는) 이 새를 만난 적이 있는지, 아파트에는 이 새가 찾아오는지, 새들을 위해 아파트 베란다에 둔 먹이대에는 어떤 새들이 찾아오는지 등을 전하는 편지랍니다. 벌써 4번째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새 이야기 담은 손편지

팔순의 맹순 씨는 <아파트탐조단>에서 새들을 그리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아파트탐조단>은 새들은 먼 곳이 아닌 내가 사는 일상에서, 우리 주변에 있는 흔한 새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사람들의 모임인데요. 탐조를 통해 아파트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 새들과 관계를 맺게 되면서 자세히 알게 되고, 나도 모르게 새들이 살고 있는 우리 주변의 환경이나 자연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하는 모임입니다. 이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분의 아들이 바로 이준이입니다. 비록 맹순 씨와 이준이가 직접 만나서 함께 탐조를 하진 않았지만 새에 대한 관심이 편지를 통해 세대를 뛰어넘는 소통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맹순 씨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데 몇 년 전부터 단지 내에 날아드는 새들을 관찰하면서 직접 그림을 그려 아파트 새지도(Bird Map)를 만들고 있습니다. 새들이 베란다에 둔 먹이대를 찾아올 때면 베란다가 가득 차기도 하고, 멧비둘기가 먹이대를 차지하기 위해 참새, 까치와 다투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일 먼저 만난 친구가 멧비둘기라 예쁘게 봐주고 싶다는 맹순 씨는 놀러오는 새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즐겁다고 말합니다. 이 즐거움을 편지를 받는 이준이가 고스란히 느낄 것 같습니다.

“환경오염이 심해져서 기후위기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날씨도 이렇게 이상한 거라고 해요. 저는 앞으로 살아갈 손주들이 걱정이에요. 그리고 아파트에서 탐조를 시작하면서 새들은 어디에서 살고 어디서 잠을 잘까 궁금해졌고 걱정이 되기도 해요. 그 전에는 이런 걸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탐조를 하게 된 게 신기하고 참 좋아요. 새들이 먹이를 먹고 있는 것만 봐도 뿌듯하고 행동을 보고 있으면 너무 귀여워요. 이런 새들이 사람들이 건물을 점점 더 많이 지으면 어디로 갈 건가 걱정도 되고요. 사람들이 조금 덜 쓰고 덜 지어서 새들도 살아갈 수 있게 했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조금 덜 쓰고 덜 지어서 새들도 살아갈 수 있게 했으면 좋겠어요." -맹순 씨


이준이는 환경생태 전문가인 아빠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환경에 관심이 많고 그래서 새와 나무 이름을 알아맞히는 게 재밌고 흥미롭다고 합니다. 특히나 새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는 걸 아주 좋아한답니다. 이준이도 아파트에서 생활하다 보니 요즘엔 아파트에서 들리는 새 소리와 날아가는 새들을 놓치지 않으려 한답니다. 또래 친구들에게 생소한 새 이름을 알려주면 친구들이 믿지도 않고 무시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새를 관찰하면서 그린 그림을 맹순 씨와 편지로 주고 받는게 더 즐겁다고 합니다. 얼마 전 맹순 씨가 선물로 보내준 조류도감에 그려놓은 동박새와 참새 그림이 너무 섬세해서 진짜처럼 느껴졌다고 하네요. 



"할머니가 보내주신 편지에 그려진 새들이 꼭 살아있는 것 같고, 제 친구인 것 같아요." -최이준


“새를 그리다 보면 힘들기도 하지만 더 자세하게 알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계속 그리고 싶어져요. 할머니께서 아파트에 찾아오는 새들을 잘 돌보고 더 잘 보살펴 주셨으면 좋겠어요. 편지에 그려진 새들이 꼭 살아있는 것 같고, 제 친구인 것 같거든요. 그리고 할머니가 살고 계신 아파트에는 밀화부리, 콩새, 되새가 날아온다고 알고 있는데 꼭 한번 직접 만나보고 싶어요. 친구들에게는 새를 자주 보면 우리도 새와 가까워질 수 있다고 꼭 말해주고 싶고요” 


더 많은 이들이 더 많은 레터를 주고받길

‘새’라는 생명체를 통해 팔순의 맹순 씨와 12살 이준이가 손편지로 소통하고 있습니다. 비록 전문적이지도 않고 내용이 많지 않지만 손으로 정성스레 그리고 쓴 편지에는 생명에 대한, 환경에 대한, 새와의 공존에 대한 관심과 걱정이 담겨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하지만 맹순 씨의 새에 대한 사랑은 더 오래 살아갈 이준이에게 ‘생명 감수성’을 놓치지 않게 하는 응원과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탐조(단순히 새를 관찰하는 것이 아닌 척박한 환경의 새들에게 물과 먹이를 주고 새집을 달아주는 활동)라는 작은 듯 작지 않은 활동을 통해 맹순 씨와 이준이 뿐 아니라 우리 모두 서로가 상생할 수 있도록 내 지역과 주변을 더 이상 파괴하지 않고 가꾸어 나가면 좋겠습니다.

새를 통해 이준이와 이준이 친구들이 생명감수성을 가질 수 있도록, 지금의 환경이 더 오염되지 않고 다음 세대가 물려받을 수 있도록, 편지에 그려지는 이 새들을 다음 세대들이 계속해서 만날 수 있도록 맹순 씨와 이준의 탐조레터가 멈추지 않기를 바라봅니다. 


| 정상용 (재)숲과나눔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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