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 머리에 은비녀를 꽂고 헐렁한 ‘몸뻬’ 바지를 즐겨 입으시던 외할머니께서 내가 16살 때 돌아가셨다. 당신을 가장 많이 닮은 넷째 딸 영순 씨가 셋방살이를 벗어나는 걸 보고 눈을 감으셨다. 할머니는 많은 손주들 중 영순 씨의 막내딸인 나를 유독 예뻐하셨다. 남존여비 사상을 숭배하시던 분이시라 여자인 나에게 남동생과는 겸상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할머니가 손자가 아닌 손녀인 나를 예뻐하신 건 의외였다. 사실 곱게 예뻐하신 게 아니라 거친 사포 같은 애정이랄까, 욕도 많이 하시고 무슨 일만 있으면 날 찾으셨다. 한마디로 할머니에게 난 만만한 손녀였던 거다.
그런 할머니께 나는 많은 삶의 팁을 얻었다. 대충 하시는 말씀 속에 인생의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었기에 귀담아듣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란 걸 살면서 깨달았다. 나는 할머니보다 현명하지 못해 늘 한 발 늦는다.
평소 할머니께서 때를 아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요즘 다시 그 말씀을 떠올리며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한다. 그림 작업의 속도가 더딘 여름이면 맥이 잘 풀린다. 방법을 몰라 헤매기도 하고 가끔 부족한 나의 능력을 탓하기도 한다. 고민은 만석 지기 부럽지 않은데 도무지 앞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은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처음 그림을 그릴 때 품었던 마음으로 되돌아가 묻는다. 남들이 ‘초심’이라고 부르는 그 마음으로 돌아가니 부족한 건 역시 공부였다. 부족함을 깨닫고 다시 처음부터 차근히 공부를 할 때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나를 낮추는 자세가 부족했던 것이다.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게을러지기 십상이니까. 게으름은 방심의 틈을 비집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은비녀를 팔아 산 정부미 포대를 이고 우리 집 대문 앞에서 우렁차게 내 이름을 부르시던 할머니. 욕창이 생긴 할머니의 등을 닦아 드릴 때 성성한 기운이 어디로 빠져나갔을까 생각했다. 사람의 시간이 저무는 과정을 본 것처럼 쓸쓸했다.
천지에 빗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서울은 장마권에 들었고 시간은 이제 여름의 절정을 향해 달린다. 공부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으니 할머니 손녀답게 때를 아는 사람이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할머니의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쪽 머리에 은비녀를 꽂고 헐렁한 ‘몸뻬’ 바지를 즐겨 입으시던 외할머니께서 내가 16살 때 돌아가셨다. 당신을 가장 많이 닮은 넷째 딸 영순 씨가 셋방살이를 벗어나는 걸 보고 눈을 감으셨다. 할머니는 많은 손주들 중 영순 씨의 막내딸인 나를 유독 예뻐하셨다. 남존여비 사상을 숭배하시던 분이시라 여자인 나에게 남동생과는 겸상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할머니가 손자가 아닌 손녀인 나를 예뻐하신 건 의외였다. 사실 곱게 예뻐하신 게 아니라 거친 사포 같은 애정이랄까, 욕도 많이 하시고 무슨 일만 있으면 날 찾으셨다. 한마디로 할머니에게 난 만만한 손녀였던 거다.
그런 할머니께 나는 많은 삶의 팁을 얻었다. 대충 하시는 말씀 속에 인생의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었기에 귀담아듣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란 걸 살면서 깨달았다. 나는 할머니보다 현명하지 못해 늘 한 발 늦는다.
평소 할머니께서 때를 아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요즘 다시 그 말씀을 떠올리며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한다. 그림 작업의 속도가 더딘 여름이면 맥이 잘 풀린다. 방법을 몰라 헤매기도 하고 가끔 부족한 나의 능력을 탓하기도 한다. 고민은 만석 지기 부럽지 않은데 도무지 앞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은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처음 그림을 그릴 때 품었던 마음으로 되돌아가 묻는다. 남들이 ‘초심’이라고 부르는 그 마음으로 돌아가니 부족한 건 역시 공부였다. 부족함을 깨닫고 다시 처음부터 차근히 공부를 할 때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나를 낮추는 자세가 부족했던 것이다.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게을러지기 십상이니까. 게으름은 방심의 틈을 비집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은비녀를 팔아 산 정부미 포대를 이고 우리 집 대문 앞에서 우렁차게 내 이름을 부르시던 할머니. 욕창이 생긴 할머니의 등을 닦아 드릴 때 성성한 기운이 어디로 빠져나갔을까 생각했다. 사람의 시간이 저무는 과정을 본 것처럼 쓸쓸했다.
천지에 빗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서울은 장마권에 들었고 시간은 이제 여름의 절정을 향해 달린다. 공부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으니 할머니 손녀답게 때를 아는 사람이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할머니의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글 · 그림 | 고정순 어린이그림책 작가이자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