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덕희 전 인천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함께사는길 이성수
“옳다고 생각하면 행동해야 한다. 그게 내 삶의 자세다.”
1958년생(호적상 1959년생), 우리 나이로 올해 66세가 되는 이덕희 전 인천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이하 직책 생략)은 전문가형 환경운동가다. 실제 보건학 박사이면서 환경운동연합 국제협력위원장을 역임한 그는 삶 속에서 체화된 과학적 사고와 지구적 감각을 바탕으로 세상에 대한 대안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차분함과 신중함이 드러나는 그의 말과 행동은 소설가 김훈의 부사 없는 간결한 문장을 떠올리게 한다. 한 사람의 언행에서 인생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고 하면, 이덕희 삶 속에 내재된 꾸밈의 절제는 통찰을 통한 전문성과 성찰적 냉정함이 동시에 훈련해야 가능하다. 이런 그가 ‘옳다고 생각하면 실천한다.’를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1970~1980년대 급진적 변혁운동의 최전선에서 가장 뜨거웠던 인사 중 하나였고 환경운동연합 창립 이전부터 환경운동의 산증인이었다는 사실을 요즘 세대 중에 아는 이가 많지 않다. 그는 반백년 가까이 환경운동연합 전후 역사와 함께했다. 그가 기억하는 환경운동연합의 과거는 어땠을까? 그리고 현재는 어떤 모습으로 평가하며 미래는 과연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과학기술 운동에서 반공해 운동으로
환경운동가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이 말을 증명하는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이덕희다. 인천 제물포 고교 시절 생물학 흥미를 계기로 그는 서울대에서 미생물학을 전공했다. 그가 대학에 입학한 1977년은 박정희 유신정권이 긴급조치를 남발하며 국민의 숨통을 조이던 시기였다. 1979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붕괴한 10·26 사건과 전두환 신군부의 군사반란인 12·12사태 그리고 1980년 뜨거운 민주화 열기가 너무나 짧게 마감된 ‘서울의 봄’과 이어진 광주민주항쟁까지 그의 학부 시절은 정상적으로 진행된 수업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입학 후 바로 흥사단 아카데미에 가입한 그는 『역사란 무엇인가』, 『전환시대의 논리』, 『후진국 경제론』, 『과학혁명의 구조』 등을 학습하고 토론하면서 민주주의가 상실된 이 땅의 암울함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젊은 혈기에 독재정권을 어떻게 무너트릴 거냐가 제일 중요했다.”라고 말할 정도로 사회의식 강한 열혈 운동권으로 성장했다. 그와 학생운동 등을 함께 했던 이들이 죽어나간 1980년 광주민주항쟁은 그가 ‘임을 위한 행진곡’의 마지막 구절인 ‘산자여 따르라’를 실천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는 군사정권에 맞서 ‘살아남은 자의 책임’을 다하고자 했고, 학생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입영 연기의 수단으로 대학원을 진학하기도 했다.
당시 서울대는 학생운동을 주도했지만, 그가 속한 이공계열은 이른바 학생운동의 불모지였다. “당시 이공계열은 사회, 정치와는 완전히 무관한 학문으로 생각했기에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이가 드물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이 때문에 이덕희는 이공계 학생들을 어떻게 사회운동에 참여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가 1980년 서울대 학보사 주최 대학 논문상에 제출해 입선한 논문은 이러한 고민이 농축돼 있었다. ‘한국 과학기술의 문제점과 그 대책’이란 논문에서 그는 ‘죽음의 물’로 불리던 석유가 ‘검은 진주’가 된 것은 사회적 필요에 따라 개발된 과학기술에 의해서 바뀌었다는 점을 언급하며 과학기술이 결코 사회와 무관한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덕희의 과학기술 운동에 대한 시각은 1980년대 민중과학론 관점도 있어 보인다. 또 과학기술과 과학기술자가 사회변혁의 중요한 도구이자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그가 강조한 과학기술 운동의 흐름은 이후 학술적으로 과학사회학 등으로 이어졌고, 1990년대 과학기술 민주화운동, 2000년대 시민과학으로 이어졌다.
당시 과학기술 운동의 흐름은 주요 학생 운동가를 반공해 운동과 연결하게 했던 배경이 됐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1981년 전국민주노동자동맹 사건과 연관된 학림사건(전국민주학생연맹)으로 이덕희를 영장 없이 강제 연행했다. 정권은 그를 군사독재의 상징인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고 가 33일간 고문하면서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수괴급으로 둔갑시키면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했다. 중간에 감형됐지만, 그래도 그는 2년 2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옥중에서 그는 두 가지 결심했다. “과거는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만 내정하게 평가를 해야 작은 거라도 교훈을 얻을 수 있다.”라는 게 첫 번째였다. 이러한 성찰적 냉정함은 그의 또 다른 삶의 철학이 됐다. “과학기술이 잘못 활용되면 사회에 발생시키는 문제가 뭐냐? 바로 환경문제다.”라는 게 감옥에서 그가 고찰한 내용이다. 과학기술 발전에 따라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생기지만, 권력과 자본은 폐해를 감추고 좋은 점은 독점했다. 과학기술 운동의 확장 관점에서 이를 바로 잡는 환경운동(당시는 반공해 운동)을 해야겠다는 것이 그의 두 번째 결심이었다. 그에 따라 83년 8월 출소 직후 그는 인천공해문제연구회 구성을 주도하면서 반공해 운동에 들어갔다. 독재정권은 청년들을 억압해 감옥으로 보냈고, 감옥에선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환경운동가들이 만들어졌다.
“리우 환경회의, 탈핵 운동” 환경연합 역대 최대 성과
당시 이덕희는 직장 생활과 반공해 운동을 병행했다. 그는 선배로서 과학기술 운동으로 연결된 대학생들의 반공해 운동을 지원하면서 교류했다. 1980년대 후반 곗돈 100만 원을 반공해운동 사무실 구입에 기부하기도 했는데, 지금으로 환산하면 어림잡아 1000만 원에 이른다. 이렇게 기부한 돈이 현재 환경운동연합이 사용하고 있는 에코센터의 밑바탕이 됐다.
1984년 반공해운동협의회(반공협)에 관여했던 그는 1987년 구성된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공청협) 회장을 맡았다. 1988년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와 단체 간 통합을 했을 때 최열, 서진옥과 함께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 공동 의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 환경연합 중앙에서 역할을 맡으면서 자신의 터전인 인천을 중심으로 환경운동을 전개했다.
이덕희는 환경운동연합의 지난 역사에서 1992년 리우 환경회의 대응 활동의 성과를 높게 평가했다. 당시 공추련은 한국위원회 구성을 주도하면서 민간단체, 기업 관계자, 문화예술인 50여 명이 브라질 리우에서 열린 지구정상회의에 참여하게 했다. 리후 환경회의는 한국의 환경운동단체들이 지구적 환경문제를 인식하게 하면서 사회적으로 ‘환경운동은 중산층 운동’이란 비난을 수그러들게 했다. 여기에 이덕희는 기업이 환경 문제를 폭넓게 인식하게 했고, 문화적 관점의 환경운동을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도 평가했다. 그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공추련이 주도적으로 풀어갔기에 그 뒤 환경운동연합이 환경운동의 어떤 리딩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다.”라고도 평가했다.
이덕희는 “우리가 그래도 좀 성공적으로 잘해온 게 반핵 운동이 아니었을까 싶다.”라면서 “만약에 이제 그런 반핵 운동이 없었다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많은 핵발전소가 한국에서 돌아가고 있을 거”라고 말했다. 사실 엄밀히 따졌을 때 지난 환경운동연합의 역사 동안 성공한 운동보다 그렇지 못한 운동이 많은 게 현실이다. 이덕희는 “싸움 자체가 필요했던 상황”이라며 “성공이 아니어도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인식 전환의 계기가 됐다라고 볼 수 있다.”라고 봤다. 실패한 운동이 아닌 역사적, 시대적 상황에서 부당한 권력과 자본에 저항하는 것 자체도 의미 있는 운동이란 말이다.
지난 환경운동연합의 역사 속에서 가장 아쉬움 부분을 꼽는 질문에 대해 그는 “지금보다 10배는 더 많은 전문가가 나왔어야 했다.”라고 지적했다. 이덕희는 1983년 과학기계 회사 말단 사원으로 입사해 퇴직 전 그곳 사장까지 올랐다. 그 사이 그는 석·박사 학위를 마쳤다. 환경운동이 진화하고 발전하는데 현상에 대한 문제 제기와 비판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우리도 대안을 얘기하려면 체계적으로 공부를 할 필요를 느꼈다.”라는 것이 학위 취득의 이유였다. 1980년대 반공협, 공청협, 공추련을 거쳐 1990년대부터 환경운동연합으로 확대해 현재에 이른 동안 많은 사람이 환경운동연합을 거쳐 갔고, 환경운동연합이란 터전을 자원삼아 전문 운동 영역으로 분화했다. 지구적 차원에서 환경문제는 더욱 세분화되고 있다. 그러나 대안을 제시하면서 운동을 주도해 나가는 운동가들의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이덕희의 시선이다. 그는 “대부분 학자들은 연구비가 나와야 연구를 하지만, 환경운동가는 지금 가능하다.”라면서 “(한 주제를) 5년만 파면 대한민국에서 그 사람을 넘어설 사람이 없다.”라고 말했다. 과거와 현재까지에 대한 그의 지적은 향후 운동가의 전문성 양성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는 걸 말해준다.
환경운동의 전문성과 초심 그리고 진정성
1980~1990년대 환경운동가는 학생운동 출신이 많았지만, 학생운동의 몰락과 세대 변화는 직업·직장 관점과 커리어 관리 측면에서 환경운동연합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어나게 했다. 활동 성향 역시 묶음과 엮음의 운동보다 파편화되고 개인화 되는 경향도 증가했다. 여기서 이덕희는 “이런 부분이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환경 속에서 어떤 운동 방법을 찾아나갈 것인가가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그는 환경운동의 전문성과 함께 초심과 진정성, 완결성을 뜻하는 인테그리티(Integrity)를 강조한다. 그리고 국제 협력의 중요성도 빼놓지 않았다. 초심이란 대중운동 조직으로서의 환경운동연합을, 인테그리티는 운동가의 진정성을 의미한다.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올라가는 상황에서 한국의 환경운동은 한국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구적 차원으로 환경운동을 확장하는 것이 운동의 주도성뿐만 아니라 환경운동의 진짜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다.
끝으로 이덕희는 젊은 활동가들에게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진진하게 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그냥 ‘노오력’이 아니라 세상과 호흡하는 환경운동의 전문성에 대한 성찰을 권했다.
글 | 이철재 에코큐레이터
이덕희 전 인천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함께사는길 이성수
“옳다고 생각하면 행동해야 한다. 그게 내 삶의 자세다.”
1958년생(호적상 1959년생), 우리 나이로 올해 66세가 되는 이덕희 전 인천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이하 직책 생략)은 전문가형 환경운동가다. 실제 보건학 박사이면서 환경운동연합 국제협력위원장을 역임한 그는 삶 속에서 체화된 과학적 사고와 지구적 감각을 바탕으로 세상에 대한 대안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차분함과 신중함이 드러나는 그의 말과 행동은 소설가 김훈의 부사 없는 간결한 문장을 떠올리게 한다. 한 사람의 언행에서 인생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고 하면, 이덕희 삶 속에 내재된 꾸밈의 절제는 통찰을 통한 전문성과 성찰적 냉정함이 동시에 훈련해야 가능하다. 이런 그가 ‘옳다고 생각하면 실천한다.’를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1970~1980년대 급진적 변혁운동의 최전선에서 가장 뜨거웠던 인사 중 하나였고 환경운동연합 창립 이전부터 환경운동의 산증인이었다는 사실을 요즘 세대 중에 아는 이가 많지 않다. 그는 반백년 가까이 환경운동연합 전후 역사와 함께했다. 그가 기억하는 환경운동연합의 과거는 어땠을까? 그리고 현재는 어떤 모습으로 평가하며 미래는 과연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과학기술 운동에서 반공해 운동으로
환경운동가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이 말을 증명하는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이덕희다. 인천 제물포 고교 시절 생물학 흥미를 계기로 그는 서울대에서 미생물학을 전공했다. 그가 대학에 입학한 1977년은 박정희 유신정권이 긴급조치를 남발하며 국민의 숨통을 조이던 시기였다. 1979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붕괴한 10·26 사건과 전두환 신군부의 군사반란인 12·12사태 그리고 1980년 뜨거운 민주화 열기가 너무나 짧게 마감된 ‘서울의 봄’과 이어진 광주민주항쟁까지 그의 학부 시절은 정상적으로 진행된 수업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입학 후 바로 흥사단 아카데미에 가입한 그는 『역사란 무엇인가』, 『전환시대의 논리』, 『후진국 경제론』, 『과학혁명의 구조』 등을 학습하고 토론하면서 민주주의가 상실된 이 땅의 암울함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젊은 혈기에 독재정권을 어떻게 무너트릴 거냐가 제일 중요했다.”라고 말할 정도로 사회의식 강한 열혈 운동권으로 성장했다. 그와 학생운동 등을 함께 했던 이들이 죽어나간 1980년 광주민주항쟁은 그가 ‘임을 위한 행진곡’의 마지막 구절인 ‘산자여 따르라’를 실천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는 군사정권에 맞서 ‘살아남은 자의 책임’을 다하고자 했고, 학생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입영 연기의 수단으로 대학원을 진학하기도 했다.
당시 서울대는 학생운동을 주도했지만, 그가 속한 이공계열은 이른바 학생운동의 불모지였다. “당시 이공계열은 사회, 정치와는 완전히 무관한 학문으로 생각했기에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이가 드물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이 때문에 이덕희는 이공계 학생들을 어떻게 사회운동에 참여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가 1980년 서울대 학보사 주최 대학 논문상에 제출해 입선한 논문은 이러한 고민이 농축돼 있었다. ‘한국 과학기술의 문제점과 그 대책’이란 논문에서 그는 ‘죽음의 물’로 불리던 석유가 ‘검은 진주’가 된 것은 사회적 필요에 따라 개발된 과학기술에 의해서 바뀌었다는 점을 언급하며 과학기술이 결코 사회와 무관한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덕희의 과학기술 운동에 대한 시각은 1980년대 민중과학론 관점도 있어 보인다. 또 과학기술과 과학기술자가 사회변혁의 중요한 도구이자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그가 강조한 과학기술 운동의 흐름은 이후 학술적으로 과학사회학 등으로 이어졌고, 1990년대 과학기술 민주화운동, 2000년대 시민과학으로 이어졌다.
당시 과학기술 운동의 흐름은 주요 학생 운동가를 반공해 운동과 연결하게 했던 배경이 됐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1981년 전국민주노동자동맹 사건과 연관된 학림사건(전국민주학생연맹)으로 이덕희를 영장 없이 강제 연행했다. 정권은 그를 군사독재의 상징인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고 가 33일간 고문하면서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수괴급으로 둔갑시키면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했다. 중간에 감형됐지만, 그래도 그는 2년 2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옥중에서 그는 두 가지 결심했다. “과거는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만 내정하게 평가를 해야 작은 거라도 교훈을 얻을 수 있다.”라는 게 첫 번째였다. 이러한 성찰적 냉정함은 그의 또 다른 삶의 철학이 됐다. “과학기술이 잘못 활용되면 사회에 발생시키는 문제가 뭐냐? 바로 환경문제다.”라는 게 감옥에서 그가 고찰한 내용이다. 과학기술 발전에 따라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생기지만, 권력과 자본은 폐해를 감추고 좋은 점은 독점했다. 과학기술 운동의 확장 관점에서 이를 바로 잡는 환경운동(당시는 반공해 운동)을 해야겠다는 것이 그의 두 번째 결심이었다. 그에 따라 83년 8월 출소 직후 그는 인천공해문제연구회 구성을 주도하면서 반공해 운동에 들어갔다. 독재정권은 청년들을 억압해 감옥으로 보냈고, 감옥에선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환경운동가들이 만들어졌다.
“리우 환경회의, 탈핵 운동” 환경연합 역대 최대 성과
당시 이덕희는 직장 생활과 반공해 운동을 병행했다. 그는 선배로서 과학기술 운동으로 연결된 대학생들의 반공해 운동을 지원하면서 교류했다. 1980년대 후반 곗돈 100만 원을 반공해운동 사무실 구입에 기부하기도 했는데, 지금으로 환산하면 어림잡아 1000만 원에 이른다. 이렇게 기부한 돈이 현재 환경운동연합이 사용하고 있는 에코센터의 밑바탕이 됐다.
1984년 반공해운동협의회(반공협)에 관여했던 그는 1987년 구성된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공청협) 회장을 맡았다. 1988년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와 단체 간 통합을 했을 때 최열, 서진옥과 함께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 공동 의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 환경연합 중앙에서 역할을 맡으면서 자신의 터전인 인천을 중심으로 환경운동을 전개했다.
이덕희는 환경운동연합의 지난 역사에서 1992년 리우 환경회의 대응 활동의 성과를 높게 평가했다. 당시 공추련은 한국위원회 구성을 주도하면서 민간단체, 기업 관계자, 문화예술인 50여 명이 브라질 리우에서 열린 지구정상회의에 참여하게 했다. 리후 환경회의는 한국의 환경운동단체들이 지구적 환경문제를 인식하게 하면서 사회적으로 ‘환경운동은 중산층 운동’이란 비난을 수그러들게 했다. 여기에 이덕희는 기업이 환경 문제를 폭넓게 인식하게 했고, 문화적 관점의 환경운동을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도 평가했다. 그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공추련이 주도적으로 풀어갔기에 그 뒤 환경운동연합이 환경운동의 어떤 리딩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다.”라고도 평가했다.
이덕희는 “우리가 그래도 좀 성공적으로 잘해온 게 반핵 운동이 아니었을까 싶다.”라면서 “만약에 이제 그런 반핵 운동이 없었다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많은 핵발전소가 한국에서 돌아가고 있을 거”라고 말했다. 사실 엄밀히 따졌을 때 지난 환경운동연합의 역사 동안 성공한 운동보다 그렇지 못한 운동이 많은 게 현실이다. 이덕희는 “싸움 자체가 필요했던 상황”이라며 “성공이 아니어도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인식 전환의 계기가 됐다라고 볼 수 있다.”라고 봤다. 실패한 운동이 아닌 역사적, 시대적 상황에서 부당한 권력과 자본에 저항하는 것 자체도 의미 있는 운동이란 말이다.
지난 환경운동연합의 역사 속에서 가장 아쉬움 부분을 꼽는 질문에 대해 그는 “지금보다 10배는 더 많은 전문가가 나왔어야 했다.”라고 지적했다. 이덕희는 1983년 과학기계 회사 말단 사원으로 입사해 퇴직 전 그곳 사장까지 올랐다. 그 사이 그는 석·박사 학위를 마쳤다. 환경운동이 진화하고 발전하는데 현상에 대한 문제 제기와 비판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우리도 대안을 얘기하려면 체계적으로 공부를 할 필요를 느꼈다.”라는 것이 학위 취득의 이유였다. 1980년대 반공협, 공청협, 공추련을 거쳐 1990년대부터 환경운동연합으로 확대해 현재에 이른 동안 많은 사람이 환경운동연합을 거쳐 갔고, 환경운동연합이란 터전을 자원삼아 전문 운동 영역으로 분화했다. 지구적 차원에서 환경문제는 더욱 세분화되고 있다. 그러나 대안을 제시하면서 운동을 주도해 나가는 운동가들의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이덕희의 시선이다. 그는 “대부분 학자들은 연구비가 나와야 연구를 하지만, 환경운동가는 지금 가능하다.”라면서 “(한 주제를) 5년만 파면 대한민국에서 그 사람을 넘어설 사람이 없다.”라고 말했다. 과거와 현재까지에 대한 그의 지적은 향후 운동가의 전문성 양성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는 걸 말해준다.
환경운동의 전문성과 초심 그리고 진정성
1980~1990년대 환경운동가는 학생운동 출신이 많았지만, 학생운동의 몰락과 세대 변화는 직업·직장 관점과 커리어 관리 측면에서 환경운동연합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어나게 했다. 활동 성향 역시 묶음과 엮음의 운동보다 파편화되고 개인화 되는 경향도 증가했다. 여기서 이덕희는 “이런 부분이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환경 속에서 어떤 운동 방법을 찾아나갈 것인가가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그는 환경운동의 전문성과 함께 초심과 진정성, 완결성을 뜻하는 인테그리티(Integrity)를 강조한다. 그리고 국제 협력의 중요성도 빼놓지 않았다. 초심이란 대중운동 조직으로서의 환경운동연합을, 인테그리티는 운동가의 진정성을 의미한다.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올라가는 상황에서 한국의 환경운동은 한국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구적 차원으로 환경운동을 확장하는 것이 운동의 주도성뿐만 아니라 환경운동의 진짜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다.
끝으로 이덕희는 젊은 활동가들에게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진진하게 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그냥 ‘노오력’이 아니라 세상과 호흡하는 환경운동의 전문성에 대한 성찰을 권했다.
글 | 이철재 에코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