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과 서양의 시간관은 다르다. 서양의 시간관은 ‘직선적’이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는 직선의 흐름 속에서 서양인들은 ‘발전적 역사관’을 만들어냈다. 동양의 시간관은 ‘순환적’이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흐름을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 동양인들은 불교의 ‘윤회사상’과 같은 것을 생각해냈다.
자연을 직선적인 사고로 마주하면 문명의 발전을 위한 개발이나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보기가 쉽다. 자연은 그저 인간을 중심에 놓고 이용하기 위한 환경에 불과할 테니까. 김선태 시인은 자연을 곡선의 시각에서 마주하고 있다. 곡선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사람은 자연을 닮아있다. “지리산 아랫마을 팔 순 할미의 허리는 / 유장하게 굽이치는 지리산 능선을 닮았다”라고 노래하는 이치가 그렇다. 닮을 수밖에 없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에서 생겨났으니까, 그리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니까.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무덤을 그래서 동양에서는 둥근 봉분의 모양으로 만드는 모양이다. 시인도 “구부러진다는 것은 돌아간다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원점으로 휘어져 회귀하는 일”인 것이다. 돌아가는 곳은 고향인 셈이니 인간의 고향은 자연인데 자연을 훼손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마음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일찍이 『목민심서』의 저자인 실학자 정약용은 자연 경작지의 존재감을 가로 곱하기 세로의 면적으로만 따져보는 관리들의 무지몽매함을 비판한 바 있다. 자연을 개발가능한 부동산 가치로만 따져보는 마음씨라면 ‘4대강 개발사업’을 추진한 이명박 정권을 능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리산은 우리나라 산들 중에서도 뾰족한 직선의 형상을 보여주는 ‘악산(岳山)’이 아니라 부드러운 능선의 형상을 보여주는 ‘토산(土山)’을 대표한다. 높기도 하지만 유역 면적이 넓어서 품이 넉넉하기로 견줄 산이 없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를 홀대하는 사람까지 품어줄 만큼 넉넉하다. 한 해를 마감하면서 그 넉넉한 자연의 품에 안겨보는 기회를 마련해보면 어떨까 싶다.
구부러지다
-김선태
이경호 문학평론가, 『상처학교의 시인』 저자 leekh72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