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놀 사건 때 대구 남구에 있는 애육원(보육원)을 방문했는데, 아이들이 냄새나는 수돗물을 그대로 먹더라. 그걸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사회적 약자에게 더 많은 상처를 줄 수 있는 게 환경문제라는 걸 절실하게 느꼈다.”

문창식 간디문화센터 대표 Ⓒ함께사는길 이성수
대구환경운동연합 문창식 전 공동의장(이하 직책 생략)은 1991년 3월 발생한 두산전자의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이 사건은 ‘해방 이후 최악의 환경오염 사건’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페놀 사태는 역설적으로 우리나라 환경정책과 환경운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며, 환경오염 사건이 어떻게 사회재난으로 확산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기도 했다.
당시 유출된 페놀은 대구 수돗물 정수장으로 유입됐다. 수돗물 소독제인 염소와 결합한 페놀은 극심한 악취를 내뿜었다. 당시 가정집, 식당 할 것 없이 수돗물로 만든 음식까지 모두 버려야 했다. 수돗물 대체제인 정수기와 먹는 샘물(생수)이 비활성화된 시기였기에 대구 팔공산 등 약수터는 사람들이 몰려 극심한 교통 체증이 일어나는 등 혼란의 연속이었다. 난리 통에 그렇게라도 할 수 있는 이들은 피해를 조금이나마 비껴갈 수 있었지만, 재난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는 시스템의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그렇게 보육원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페놀 악취로 뒤덮인 수돗물로 마른 갈증을 풀어야 했다. 이때 충격은 문창식을 환경운동가의 길로 이끌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참된 이의 의무
1964년생인 문창식은 우리 나이로 올해 예순이다. 그는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대구공해추방운동협의회(이하 대구공추협)에서 1992년부터 활동하기 시작했고, 그 후 30년 넘게 대구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과 공동의장을 거쳐 현재는 간디문화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대와 사회가 운동가를 만들었다.’라는 그는 정학 전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이재용 전 환경부 장관 등과 함께 대구 지역 1세대 환경운동가로 꼽힌다. 그는 주요 시기마다 과감하게 변화를 꾀하는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사회와 시대가 그에게 역할을 요구할 때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삶 속엔 휴머니즘과 종교적이면서 철학에 기반한 성찰적 환경운동 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 환경교육에 대한 고민 역시 깊다. 이러한 모습은 여타 1세대와 다르면서 비슷한 점이다.
청소년 시절 문창식은 기독교 영향을 많이 받았다. 때문에 “형이상학적 고민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예수 믿고 회개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본연의 의무를 다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그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종교적 윤리 의식도 강했다. 고교 2학년 때 전교 1등까지 하면서 학교와 집에서 서울대 입학에 대한 기대를 받았지만, 그는 경쟁 대신 ‘덧없는 인생’이란 의식 속에 고3 때 아예 교회에 빠져서 살았다. 1983년 경북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그는 우연한 계기로 사회봉사 단체인 참길회에 참여했다. 참길회는 대구 지역 노약자와 장애인 복지시설, 경북 칠곡에 있는 한센병 환자 마을에서 정기적으로 자원봉사 활동을 벌이는 단체였다. 참길회에도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고교 졸업하면서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그가 볼 때 ‘네 이웃 사랑하기 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라는 기독교 윤리는 교회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저 1년에 한두 차례 생색내기만 있을 뿐이었다. 교회와 현실의 삶이 괴리된 신앙인들을 보면서 그는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실천하면서 이제 내 스스로가 가졌던 이 신앙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참길회에서 굉장히 열심히 생활했다.”라고 말했다. 이념적 지향점과 실제 삶과의 괴리현상을 최소화하려는 그의 태도는 이후 환경운동 과정에도 투영됐다. 문창식은 3학년 때 참길회 회장까지 맡으면서 교회 밖에서 보편적 종교의 기본인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을 실천했다. 그러면서 전두환 독재에 저항하는 시위에도 참여했다. 그는 “그거 안 하면 양심의 가책이 너무 컸던 시절”이라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그런 그를 학생운동권에서 공대 학생회장 후보로 만들기 위해 참길회와 신경전(?)을 벌이는 일도 있었다. 문창식은 1990년부터 2년 동안 대기업 전자 회사 구미연수원에서 근무했다. 그는 1991년 대구공추협 창립회원으로 참여한 이후 1992년부터 2006년까지 환경운동연합에서 상근 활동을 이어갔다.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았던 환경운동가
환경운동연합에서 문창식은 매년 수질 오염 관련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낙동강 문제에 집중했다. 안전한 수돗물을 화두로 낙동강 유역 차원에서 공동으로 운동을 벌인 결과 2002년 「낙동강 수계 물 관리 및 주민지원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기도 했다. 그는 해인사 인근 가야산 골프장 싸움도 기억에 남는 활동으로 꼽았다. 그는 15년 동안 끈질기게 싸워서 골프장 건설을 막아낸 것도 의미 있지만, 이 싸움을 통해 국립공원 내 골프장과 스키장 등을 건설할 수 없도록 「자연공원법」 시행령을 개정한 것이 중요했다고 보고 있다. 그는 1993년 환경운동연합 결성 이후 지역 사안에 대해 전국의 힘을 빌려 운동을 벌여나갔다는 점도 의미 있는 지점이라 말했다. 다만, 일이 바빠서 환경운동에 대한 철학과 이념을 깊게 하지 못한 부분을 아쉬운 점이라 말했다.
환경운동연합은 시민운동단체로서 환경 사안만 하지 않았다. 2000년 전국 400여 시민단체가 부패·무능 정치인 심판과 왜곡된 정치구조개혁, 국민주권 찾기를 목적으로 총선시민연대 활동을 벌일 때 환경운동연합은 전국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지역을 조직해 나갔다. 이 시기 문창식은 대구총선시민연대 활동을 통해 “시민사회에 대한 시민의 기대를 확인했다.”라고 평가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 벌어졌을 때 문창식은 시민단체 공동집행위원장으로 대구에서 한 달 이상 시위를 이어갔다. 그는 종교계를 찾아다니며 반미주의가 아닌 생명과 평화를 강조하며 참여를 호소했다. 1천 명을 목표했는데, 경찰 집계 1만5천 명의 시민이 참여해 촛불 행진을 벌인 일도 있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내일신문>과의 인터뷰(2010.02.16.)에서 “바로 이거다 싶었다. 선동적인 구호나 거창한 슬로건보다 생명과 평화라는 평범한 가치가 사람들 마음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라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6년, 건설사 CEO 출신으로 한반도대운하를 공약한 이명박이 유력 대선 후보로 부상했다.
시민단체 내에선 2007년 대선 승리를 위해서라도 민주당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에 따른 전국 조직화 작업이 진행됐다. 대구에선 문창식이 책임자로 나섰다. 그는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와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의 단일화를 요구하는 광화문 단식 농성에 참여하기도 했다. 환경운동연합은 단체 임원의 정치적 활동을 제한하기에 그는 대구환경운동연합을 사직했다. 이에 대해 그는 “그 활동에 대해 후회나 이런 건 없다.”라면서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제 우리 사회가 주어지는 역할이라면 그건 비껴가서는 안 된다, 그런 주의였다.”라고 말했다.
2007년부터 문창식은 경북 군위군 소보면에서 간디문화센터를 만들었다. 십시일반 자금을 모으고 은행 융자를 받아 건물과 부지를 매입해 청소년 대안 캠프, 다문화 가정 지원, 공익활동 지원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는 간디문화센터라는 현장을 통해 운동과 삶을 일치하고자 했다. 간디문화센터는 1세대 환경운동가로써 새로운 영역을 만들고자 하는 그의 차원 전환을 위한 실험이기도 했다. 그는 운동하면서 철학적 빈곤을 느꼈고, 동서양 철학에 심취했다.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서양철학의 한계 때문에 그는 시경(詩經), 주역(周易) 등 동양철학까지 공부했다. 이를 통해 그는 “인간에 대한 이해 이런 게 많이 넓어졌다.”라면서 “섣불리 판단하고 그런 것도 많이 좀 교정도 됐다.”라고 말했다. 환경운동에 대한 인식도 명확해졌다. 그는 환경만 떼어놓고 절대시해서는, 다시 말해 환경을 환경 영역에만 국한한 시각을 탈피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의 관점에서 환경운동가만의 환경운동이 아닌 모두의 환경운동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역할일 것이다.
환경운동연합 30년, 우리 사회 발전에 큰 영역 담당
문창식은 “환경운동연합을 빼고 내 삶을 설명하기 어렵다.”라며 “환경운동연합은 내 삶을 형성한 터전, 삶터”라고 말한다. 지난 30여 년의 환경운동연합의 사회적 역할과 의의에 대해 그는 “우리 사회가 올바르게 발전하는 데 큰 영역을 담당했다. 그런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라고 짚었다. 문창식은 회원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우리 활동이 빛나는 건 회원을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거 잊으면 시민단체로서 자격이 없다.”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또 그는 시대 변화를 주목할 것도 주문했다. 사람과 조직을 대규모로 동원하는 것이 이전의 운동 방식이라면 최근에는 개인의 활동 역량에 따라 유의미한 성과가 나오기에 “활동가 개인의 활동을 더 안정되게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필요하다.”라고 보고 있다. 문창식은 환경운동연합이 시민 대상 활동할 때 항상 되돌아보는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야 “시민들이 좀 더 따뜻하게 우리를 바라보게 될 것이며, 할 일도 더 많이 생길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으로 시작한 그의 환경운동은 지난 30년 여러 현장과 철학적 사고. 그리고 내적 성찰을 거치면서 깊어지고 단단해졌다. 오늘도 그는 평생 환경운동가의 삶을 실천하기 위해 새로운 전환과 도약을 위한 실험을 준비하고 있다.
글 | 이철재 에코큐레이터
“페놀 사건 때 대구 남구에 있는 애육원(보육원)을 방문했는데, 아이들이 냄새나는 수돗물을 그대로 먹더라. 그걸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사회적 약자에게 더 많은 상처를 줄 수 있는 게 환경문제라는 걸 절실하게 느꼈다.”
문창식 간디문화센터 대표 Ⓒ함께사는길 이성수
대구환경운동연합 문창식 전 공동의장(이하 직책 생략)은 1991년 3월 발생한 두산전자의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이 사건은 ‘해방 이후 최악의 환경오염 사건’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페놀 사태는 역설적으로 우리나라 환경정책과 환경운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며, 환경오염 사건이 어떻게 사회재난으로 확산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기도 했다.
당시 유출된 페놀은 대구 수돗물 정수장으로 유입됐다. 수돗물 소독제인 염소와 결합한 페놀은 극심한 악취를 내뿜었다. 당시 가정집, 식당 할 것 없이 수돗물로 만든 음식까지 모두 버려야 했다. 수돗물 대체제인 정수기와 먹는 샘물(생수)이 비활성화된 시기였기에 대구 팔공산 등 약수터는 사람들이 몰려 극심한 교통 체증이 일어나는 등 혼란의 연속이었다. 난리 통에 그렇게라도 할 수 있는 이들은 피해를 조금이나마 비껴갈 수 있었지만, 재난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는 시스템의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그렇게 보육원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페놀 악취로 뒤덮인 수돗물로 마른 갈증을 풀어야 했다. 이때 충격은 문창식을 환경운동가의 길로 이끌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참된 이의 의무
1964년생인 문창식은 우리 나이로 올해 예순이다. 그는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대구공해추방운동협의회(이하 대구공추협)에서 1992년부터 활동하기 시작했고, 그 후 30년 넘게 대구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과 공동의장을 거쳐 현재는 간디문화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대와 사회가 운동가를 만들었다.’라는 그는 정학 전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이재용 전 환경부 장관 등과 함께 대구 지역 1세대 환경운동가로 꼽힌다. 그는 주요 시기마다 과감하게 변화를 꾀하는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사회와 시대가 그에게 역할을 요구할 때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삶 속엔 휴머니즘과 종교적이면서 철학에 기반한 성찰적 환경운동 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 환경교육에 대한 고민 역시 깊다. 이러한 모습은 여타 1세대와 다르면서 비슷한 점이다.
청소년 시절 문창식은 기독교 영향을 많이 받았다. 때문에 “형이상학적 고민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예수 믿고 회개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본연의 의무를 다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그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종교적 윤리 의식도 강했다. 고교 2학년 때 전교 1등까지 하면서 학교와 집에서 서울대 입학에 대한 기대를 받았지만, 그는 경쟁 대신 ‘덧없는 인생’이란 의식 속에 고3 때 아예 교회에 빠져서 살았다. 1983년 경북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그는 우연한 계기로 사회봉사 단체인 참길회에 참여했다. 참길회는 대구 지역 노약자와 장애인 복지시설, 경북 칠곡에 있는 한센병 환자 마을에서 정기적으로 자원봉사 활동을 벌이는 단체였다. 참길회에도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고교 졸업하면서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그가 볼 때 ‘네 이웃 사랑하기 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라는 기독교 윤리는 교회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저 1년에 한두 차례 생색내기만 있을 뿐이었다. 교회와 현실의 삶이 괴리된 신앙인들을 보면서 그는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실천하면서 이제 내 스스로가 가졌던 이 신앙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참길회에서 굉장히 열심히 생활했다.”라고 말했다. 이념적 지향점과 실제 삶과의 괴리현상을 최소화하려는 그의 태도는 이후 환경운동 과정에도 투영됐다. 문창식은 3학년 때 참길회 회장까지 맡으면서 교회 밖에서 보편적 종교의 기본인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을 실천했다. 그러면서 전두환 독재에 저항하는 시위에도 참여했다. 그는 “그거 안 하면 양심의 가책이 너무 컸던 시절”이라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그런 그를 학생운동권에서 공대 학생회장 후보로 만들기 위해 참길회와 신경전(?)을 벌이는 일도 있었다. 문창식은 1990년부터 2년 동안 대기업 전자 회사 구미연수원에서 근무했다. 그는 1991년 대구공추협 창립회원으로 참여한 이후 1992년부터 2006년까지 환경운동연합에서 상근 활동을 이어갔다.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았던 환경운동가
환경운동연합에서 문창식은 매년 수질 오염 관련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낙동강 문제에 집중했다. 안전한 수돗물을 화두로 낙동강 유역 차원에서 공동으로 운동을 벌인 결과 2002년 「낙동강 수계 물 관리 및 주민지원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기도 했다. 그는 해인사 인근 가야산 골프장 싸움도 기억에 남는 활동으로 꼽았다. 그는 15년 동안 끈질기게 싸워서 골프장 건설을 막아낸 것도 의미 있지만, 이 싸움을 통해 국립공원 내 골프장과 스키장 등을 건설할 수 없도록 「자연공원법」 시행령을 개정한 것이 중요했다고 보고 있다. 그는 1993년 환경운동연합 결성 이후 지역 사안에 대해 전국의 힘을 빌려 운동을 벌여나갔다는 점도 의미 있는 지점이라 말했다. 다만, 일이 바빠서 환경운동에 대한 철학과 이념을 깊게 하지 못한 부분을 아쉬운 점이라 말했다.
환경운동연합은 시민운동단체로서 환경 사안만 하지 않았다. 2000년 전국 400여 시민단체가 부패·무능 정치인 심판과 왜곡된 정치구조개혁, 국민주권 찾기를 목적으로 총선시민연대 활동을 벌일 때 환경운동연합은 전국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지역을 조직해 나갔다. 이 시기 문창식은 대구총선시민연대 활동을 통해 “시민사회에 대한 시민의 기대를 확인했다.”라고 평가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 벌어졌을 때 문창식은 시민단체 공동집행위원장으로 대구에서 한 달 이상 시위를 이어갔다. 그는 종교계를 찾아다니며 반미주의가 아닌 생명과 평화를 강조하며 참여를 호소했다. 1천 명을 목표했는데, 경찰 집계 1만5천 명의 시민이 참여해 촛불 행진을 벌인 일도 있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내일신문>과의 인터뷰(2010.02.16.)에서 “바로 이거다 싶었다. 선동적인 구호나 거창한 슬로건보다 생명과 평화라는 평범한 가치가 사람들 마음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라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6년, 건설사 CEO 출신으로 한반도대운하를 공약한 이명박이 유력 대선 후보로 부상했다.
시민단체 내에선 2007년 대선 승리를 위해서라도 민주당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에 따른 전국 조직화 작업이 진행됐다. 대구에선 문창식이 책임자로 나섰다. 그는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와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의 단일화를 요구하는 광화문 단식 농성에 참여하기도 했다. 환경운동연합은 단체 임원의 정치적 활동을 제한하기에 그는 대구환경운동연합을 사직했다. 이에 대해 그는 “그 활동에 대해 후회나 이런 건 없다.”라면서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제 우리 사회가 주어지는 역할이라면 그건 비껴가서는 안 된다, 그런 주의였다.”라고 말했다.
2007년부터 문창식은 경북 군위군 소보면에서 간디문화센터를 만들었다. 십시일반 자금을 모으고 은행 융자를 받아 건물과 부지를 매입해 청소년 대안 캠프, 다문화 가정 지원, 공익활동 지원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는 간디문화센터라는 현장을 통해 운동과 삶을 일치하고자 했다. 간디문화센터는 1세대 환경운동가로써 새로운 영역을 만들고자 하는 그의 차원 전환을 위한 실험이기도 했다. 그는 운동하면서 철학적 빈곤을 느꼈고, 동서양 철학에 심취했다.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서양철학의 한계 때문에 그는 시경(詩經), 주역(周易) 등 동양철학까지 공부했다. 이를 통해 그는 “인간에 대한 이해 이런 게 많이 넓어졌다.”라면서 “섣불리 판단하고 그런 것도 많이 좀 교정도 됐다.”라고 말했다. 환경운동에 대한 인식도 명확해졌다. 그는 환경만 떼어놓고 절대시해서는, 다시 말해 환경을 환경 영역에만 국한한 시각을 탈피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의 관점에서 환경운동가만의 환경운동이 아닌 모두의 환경운동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역할일 것이다.
환경운동연합 30년, 우리 사회 발전에 큰 영역 담당
문창식은 “환경운동연합을 빼고 내 삶을 설명하기 어렵다.”라며 “환경운동연합은 내 삶을 형성한 터전, 삶터”라고 말한다. 지난 30여 년의 환경운동연합의 사회적 역할과 의의에 대해 그는 “우리 사회가 올바르게 발전하는 데 큰 영역을 담당했다. 그런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라고 짚었다. 문창식은 회원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우리 활동이 빛나는 건 회원을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거 잊으면 시민단체로서 자격이 없다.”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또 그는 시대 변화를 주목할 것도 주문했다. 사람과 조직을 대규모로 동원하는 것이 이전의 운동 방식이라면 최근에는 개인의 활동 역량에 따라 유의미한 성과가 나오기에 “활동가 개인의 활동을 더 안정되게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필요하다.”라고 보고 있다. 문창식은 환경운동연합이 시민 대상 활동할 때 항상 되돌아보는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야 “시민들이 좀 더 따뜻하게 우리를 바라보게 될 것이며, 할 일도 더 많이 생길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으로 시작한 그의 환경운동은 지난 30년 여러 현장과 철학적 사고. 그리고 내적 성찰을 거치면서 깊어지고 단단해졌다. 오늘도 그는 평생 환경운동가의 삶을 실천하기 위해 새로운 전환과 도약을 위한 실험을 준비하고 있다.
글 | 이철재 에코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