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때 해수욕장에 갔는데, 빨간 물이 출렁거리더라. 바닷물 자체가”
어떤 이에게 어릴 적 고향이 신작로 따라 올라오는 노란색 아지랑이 빛깔로 기억된다면, 1963년생으로 올해 우리 나이로 환갑을 맞은 <중앙일보> 강찬수 환경전문기자가 회상하는 50여 년 전 고향 경남 마산의 빛깔은 온 바다를 뒤덮은 적조의 붉은색이었다. 변변한 하수처리시설조차 없었던 1970년대 바다는 육지에서 그대로 쏟아지는 쓰레기 더미와 각종 오염물질에 몸살을 앓았다. 그 때문에 해수욕장이 폐쇄될 정도였다. 본래 빛깔을 상실한 자연에 대한 충격은 그가 평생 에코 인(人)의 삶을 걷게 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그가 1982년 서울대 미생물학과를 입학해서 적조, 녹조 문제에 집중해 박사학위를 딴 것도 어릴 적부터의 관심이 배경이 됐다고 한다.
강찬수는 박사학위 취득 후인 1994년 <중앙일보> 환경전문기자로 입사해 올해로 기자 생활 30년 차에 이르렀다.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 이후 우리 사회는 이전 군사독재 정권이 성장 제일주의를 위해 억눌렀던 각종 사회 문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공해문제와 환경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주요 언론사는 1990년대 초반부터(특히 1991년 낙동강 페놀 사태 이후) 환경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루기 위해 환경전문기자 제도를 도입했다.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30년

강찬수 기자 Ⓒ함께사는길 이성수
강찬수가 환경전문기자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분명했다. 그에게 기자는 그냥 직업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의 환경운동을 한다, 이렇게 생각했다. 전공이 생태학이고 환경을 했기에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환경문제 해결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라고 말했다. 이런 경향은 강찬수의 미생물학과 5년 선배인 이덕희 전 인천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등이 주창한 과학기술 운동과 맥을 같이한다(『함께사는길』 2023년 1월호 기사 참조).
그는 기자로 활동하기 이전 잠시 대학에서 강의를 맡은 적이 있었다. 그가 생각할 때 한 해 200~300명에게 환경강의를 하는 것보다 100만~200만 명의 구독자가 있는 신문에서 기사를 써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게 더 임펙트가 있을 것으로 봤다. 30년 전 환경운동의 하나로 기자 생활을 시작했던 그 다짐은 현재까지 그를 환경전문기자로 활동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환경운동가 관점의 환경전문기자로서 그는 “30년 동안 뭔가를 해결하기 위해 싸웠다는 생각밖에 안 남는다.”라면서 자신의 지난 세월을 회고했다. 한번은 그가 대기업 운영 공장 굴뚝에서 다이옥신이 기준치를 초과한 사실을 보도하자, 그 기업이 문제 해결을 위해 2000억 원을 들인 일이 있었다. 1990년대 후반 그는 영월 동강댐 문제를 1면으로 내보냈던 일도 의미 있는 기억으로 떠올렸다. 사실 <중앙일보>의 보수적 색채 때문에 그는 환경문제 관련 지면을 확보하기 위한 내부 싸움을 치열하게 벌였을 거로 보인다. 학계 내 대표적 4대강 찬동인사인 모 교수가 ‘<중앙일보>에 강찬수라는 빨갱이가 있어서 문제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떠벌리는 일도 있었다.
평소 차분한 성격의 그는 정부의 부당한 환경정책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각을 세웠다. 2009년 11월 환경부의 4대강사업 환경영향평가 통과 기자 브리핑 자리에서 강찬수는 ‘비과학적 환경영향평가’라며 강하게 항의해 환경부 관계자를 쩔쩔매게 만들었다(당시 현장에서 필자가 직접 목격). 또 윤석열 정부 환경부가 지난 2월 말 설악산 케이블카 환경영향평가를 통과시키자 (환경부 출입 다른 매체 젊은 기자들은 가만히 있는 상황에서) 그는 환경부 장관을 직접 찾아가 강하게 해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환경부가 4대강사업으로 만들어진 보를 다시 활용하려고 할 때 이를 가장 강하게 비판하는 것도 그였다. 그는 국립환경과학원의 4대강사업과 관련한 비과학적 행태를 두고 ‘환경’을 떼라고 꼬집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는 여전히 환경 취재 현장에서 뛰면서 ‘강찬수의 에코사이언스’라는 기명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그는 과학적 관점으로 우리 사회의 숱한 환경문제를 진단하고 그 해법까지 제시하려 노력하고 있다. 2014년에 발간된 『에코사전』(꿈결)과 같은 저작은 그가 환경문제 전반에 얼마나 깊은 관심과 전문성이 있는지 잘 드러난다.
환경운동가이자 환경전문기자로서 강찬수는 환경운동연합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했다. 또 그는 환경운동연합 30년 회원이기도 하다. 그는 “환경운동연합은 거울”이라고 말한다. 지난 30년 환경운동연합은 그가 자신이 활동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비춰보는 거울 같은 존재, 다시 말해 기준이었다. 또 기자로서 환경운동연합이 제대로 환경운동을 벌이고 있는지도 감시해왔다. 사회적 공기(公器)로써 환경운동연합은 많은 이들이 주목했다. 환경운동연합이 우리 사회 환경운동을 평가하는 기준이었고, 그에 따른 영향력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강찬수는 자연의 순환 속도를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을 환경운동이라고 보고 있다. 자연의 순환 속도에 인간의 속도가 개입하면서 불균형이 발생했는데, 그는 이것을 환경문제의 본질이라고 봤다. 따라서 이를 바로 잡는 것이 환경운동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4대강사업, 설악산 케이블카, 흑산도 공항은 대표적으로 인간이 개입해 자연과 인간 사이에 불균형을 만들었던 사업이기에 그는 계속 싸울 수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다.
환경운동은 자연의 순환 속도로 되돌리는 것
지난 30년 반핵운동을 환경운동연합의 상징적 활동으로 꼽은 그는 환경운동연합에 대해 “폭발적으로 시민운동이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환경운동연합과 같은 시민단체를 통해서 시민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하면서 한국 사회의 흐름을 바꾸었다.”라고 평가했다. 또 그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에 걸맞게 국민적 시민의식을 갖춘 나라로 만드는 데에도 환경운동연합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점도 꼽았다. 이런 시민의식 때문에 폐기물, 수질, 대기오염 문제 등이 상당히 빨리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언론이 역할도 하지만, 언론은 문제 제기만 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계속 현장에서 바꾸어가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 역할을 환경운동연합이 해왔다는 평가였다.
반면 그가 볼 때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그는 “환경운동연합은 창립 후 한국 환경운동의 구심점이자 핵심이었지만, 지난 10년 동안에는 중심적인 무게감이 좀 줄어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전 환경운동연합이 중앙을 중심으로 집중했다면, 지난 10년 동안 지역으로 힘을 분산하면서 중앙의 힘이 없어 보였던 측면이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또 다른 환경단체의 역할이 커진 부분도 언급했다. 특히 특정 분야 전문환경단체 성장세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는 “어떻게 보면 환경운동의 외연 확장에 따라 전체 환경운동은 커졌지만, 다른 단체들이 활동을 많이 하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환경운동연합의 비중이 적어 보이는 측면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강력한 맨파워를 바탕으로 네트워크를 구성해 환경운동을 벌였던 환경운동연합이 지난 기간 동안 정부와 정치권 등 제도권으로 진출하면서 생긴 빈자리의 영향도 꼽았다. 이 자리를 다음 세대가 충원해야 하는데, 과거처럼 그게 잘 안된 측면도 있다고 분석했다.
향후 운동 방향에 대해 강찬수는 “국내적이든 글로벌한 문제든 간에 10년 안에 물꼬를 트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면에서 기후변화가 문제가 제일 크다.”라고 짚었다. 국내적으로 봤을 때 그는 4대강 보 문제를 핵심으로 지적했다. 그는 “(4대강 보 논란은) 과학과 반과학의 싸움이라고 보는데, 우리가 이걸 해결하지 못한다면 더 중요한 기후위기 등 어떤 문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거다. 그 정도로 절박하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기자와 환경운동가의 차이에 대해서도 짚었다. 기자는 질문해서 답을 받아 기사만 쓰면 되지만, 환경운동을 통해서 성과를 거두려면 사람들을 엮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세상을 바꾸려면 전문가, 정치인, 언론, 시민, 지역주민을 엮어야 일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환경운동가는 네트워킹하는 게 가장 핵심”이라고 말했다.
지난 30년 동안 많은 환경운동가가 만들어졌다. 강찬수는 환경운동가의 각 세대에 따라 특징을 꼽았다. 그의 말을 요약하자면, 60~70대 환경운동가가 사람 중심으로 눈에 보이는 환경문제 해결에 집중했다면, 지금 40~50대 환경운동가는 여기에 자연생태 쪽으로 관심을 확장했다. 20~30대의 젊은 환경운동가는 기후 문제나 에너지 등 지구적 차원으로 환경운동의 영역을 더 넓게 본다는 특징이 있다. 강찬수는 젊은 세대 환경운동가들이 환경문제를 좀 더 친근하고 재밌게 접근하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라고 봤다. 그는 젊은 활동가들에게 “가슴은 따뜻하게, 머리는 차갑게, 발은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한다.”라고 말한다. 코로나19 등에 따라 웬만한 일을 비대면으로 해결하려는 게 현재의 추세라곤 하지만, 환경운동가는 사람을 직접 대면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문이다. 또 그는 전문성 증진에도 노력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누가 (제대로 된) 전문가이고 그 전문가가 제대로 보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게 그 이유였다.
끝으로 그는 환경운동연합에 대해 “기자로서, 회원으로서 30년을 계속 봐왔는데, 많은 시간 동안 어려움도 컸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제 환경운동의 외연을 넓히는데, 우리 사회 환경운동의 여전히 중심축으로 큰 역할을 해왔다.”라면서 “앞으로도 우리 사회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해나가 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글 | 이철재 에코큐레이터
“10살 때 해수욕장에 갔는데, 빨간 물이 출렁거리더라. 바닷물 자체가”
어떤 이에게 어릴 적 고향이 신작로 따라 올라오는 노란색 아지랑이 빛깔로 기억된다면, 1963년생으로 올해 우리 나이로 환갑을 맞은 <중앙일보> 강찬수 환경전문기자가 회상하는 50여 년 전 고향 경남 마산의 빛깔은 온 바다를 뒤덮은 적조의 붉은색이었다. 변변한 하수처리시설조차 없었던 1970년대 바다는 육지에서 그대로 쏟아지는 쓰레기 더미와 각종 오염물질에 몸살을 앓았다. 그 때문에 해수욕장이 폐쇄될 정도였다. 본래 빛깔을 상실한 자연에 대한 충격은 그가 평생 에코 인(人)의 삶을 걷게 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그가 1982년 서울대 미생물학과를 입학해서 적조, 녹조 문제에 집중해 박사학위를 딴 것도 어릴 적부터의 관심이 배경이 됐다고 한다.
강찬수는 박사학위 취득 후인 1994년 <중앙일보> 환경전문기자로 입사해 올해로 기자 생활 30년 차에 이르렀다.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 이후 우리 사회는 이전 군사독재 정권이 성장 제일주의를 위해 억눌렀던 각종 사회 문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공해문제와 환경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주요 언론사는 1990년대 초반부터(특히 1991년 낙동강 페놀 사태 이후) 환경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루기 위해 환경전문기자 제도를 도입했다.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30년
강찬수 기자 Ⓒ함께사는길 이성수
강찬수가 환경전문기자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분명했다. 그에게 기자는 그냥 직업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의 환경운동을 한다, 이렇게 생각했다. 전공이 생태학이고 환경을 했기에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환경문제 해결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라고 말했다. 이런 경향은 강찬수의 미생물학과 5년 선배인 이덕희 전 인천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등이 주창한 과학기술 운동과 맥을 같이한다(『함께사는길』 2023년 1월호 기사 참조).
그는 기자로 활동하기 이전 잠시 대학에서 강의를 맡은 적이 있었다. 그가 생각할 때 한 해 200~300명에게 환경강의를 하는 것보다 100만~200만 명의 구독자가 있는 신문에서 기사를 써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게 더 임펙트가 있을 것으로 봤다. 30년 전 환경운동의 하나로 기자 생활을 시작했던 그 다짐은 현재까지 그를 환경전문기자로 활동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환경운동가 관점의 환경전문기자로서 그는 “30년 동안 뭔가를 해결하기 위해 싸웠다는 생각밖에 안 남는다.”라면서 자신의 지난 세월을 회고했다. 한번은 그가 대기업 운영 공장 굴뚝에서 다이옥신이 기준치를 초과한 사실을 보도하자, 그 기업이 문제 해결을 위해 2000억 원을 들인 일이 있었다. 1990년대 후반 그는 영월 동강댐 문제를 1면으로 내보냈던 일도 의미 있는 기억으로 떠올렸다. 사실 <중앙일보>의 보수적 색채 때문에 그는 환경문제 관련 지면을 확보하기 위한 내부 싸움을 치열하게 벌였을 거로 보인다. 학계 내 대표적 4대강 찬동인사인 모 교수가 ‘<중앙일보>에 강찬수라는 빨갱이가 있어서 문제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떠벌리는 일도 있었다.
평소 차분한 성격의 그는 정부의 부당한 환경정책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각을 세웠다. 2009년 11월 환경부의 4대강사업 환경영향평가 통과 기자 브리핑 자리에서 강찬수는 ‘비과학적 환경영향평가’라며 강하게 항의해 환경부 관계자를 쩔쩔매게 만들었다(당시 현장에서 필자가 직접 목격). 또 윤석열 정부 환경부가 지난 2월 말 설악산 케이블카 환경영향평가를 통과시키자 (환경부 출입 다른 매체 젊은 기자들은 가만히 있는 상황에서) 그는 환경부 장관을 직접 찾아가 강하게 해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환경부가 4대강사업으로 만들어진 보를 다시 활용하려고 할 때 이를 가장 강하게 비판하는 것도 그였다. 그는 국립환경과학원의 4대강사업과 관련한 비과학적 행태를 두고 ‘환경’을 떼라고 꼬집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는 여전히 환경 취재 현장에서 뛰면서 ‘강찬수의 에코사이언스’라는 기명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그는 과학적 관점으로 우리 사회의 숱한 환경문제를 진단하고 그 해법까지 제시하려 노력하고 있다. 2014년에 발간된 『에코사전』(꿈결)과 같은 저작은 그가 환경문제 전반에 얼마나 깊은 관심과 전문성이 있는지 잘 드러난다.
환경운동가이자 환경전문기자로서 강찬수는 환경운동연합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했다. 또 그는 환경운동연합 30년 회원이기도 하다. 그는 “환경운동연합은 거울”이라고 말한다. 지난 30년 환경운동연합은 그가 자신이 활동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비춰보는 거울 같은 존재, 다시 말해 기준이었다. 또 기자로서 환경운동연합이 제대로 환경운동을 벌이고 있는지도 감시해왔다. 사회적 공기(公器)로써 환경운동연합은 많은 이들이 주목했다. 환경운동연합이 우리 사회 환경운동을 평가하는 기준이었고, 그에 따른 영향력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강찬수는 자연의 순환 속도를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을 환경운동이라고 보고 있다. 자연의 순환 속도에 인간의 속도가 개입하면서 불균형이 발생했는데, 그는 이것을 환경문제의 본질이라고 봤다. 따라서 이를 바로 잡는 것이 환경운동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4대강사업, 설악산 케이블카, 흑산도 공항은 대표적으로 인간이 개입해 자연과 인간 사이에 불균형을 만들었던 사업이기에 그는 계속 싸울 수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다.
환경운동은 자연의 순환 속도로 되돌리는 것
지난 30년 반핵운동을 환경운동연합의 상징적 활동으로 꼽은 그는 환경운동연합에 대해 “폭발적으로 시민운동이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환경운동연합과 같은 시민단체를 통해서 시민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하면서 한국 사회의 흐름을 바꾸었다.”라고 평가했다. 또 그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에 걸맞게 국민적 시민의식을 갖춘 나라로 만드는 데에도 환경운동연합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점도 꼽았다. 이런 시민의식 때문에 폐기물, 수질, 대기오염 문제 등이 상당히 빨리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언론이 역할도 하지만, 언론은 문제 제기만 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계속 현장에서 바꾸어가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 역할을 환경운동연합이 해왔다는 평가였다.
반면 그가 볼 때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그는 “환경운동연합은 창립 후 한국 환경운동의 구심점이자 핵심이었지만, 지난 10년 동안에는 중심적인 무게감이 좀 줄어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전 환경운동연합이 중앙을 중심으로 집중했다면, 지난 10년 동안 지역으로 힘을 분산하면서 중앙의 힘이 없어 보였던 측면이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또 다른 환경단체의 역할이 커진 부분도 언급했다. 특히 특정 분야 전문환경단체 성장세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는 “어떻게 보면 환경운동의 외연 확장에 따라 전체 환경운동은 커졌지만, 다른 단체들이 활동을 많이 하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환경운동연합의 비중이 적어 보이는 측면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강력한 맨파워를 바탕으로 네트워크를 구성해 환경운동을 벌였던 환경운동연합이 지난 기간 동안 정부와 정치권 등 제도권으로 진출하면서 생긴 빈자리의 영향도 꼽았다. 이 자리를 다음 세대가 충원해야 하는데, 과거처럼 그게 잘 안된 측면도 있다고 분석했다.
향후 운동 방향에 대해 강찬수는 “국내적이든 글로벌한 문제든 간에 10년 안에 물꼬를 트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면에서 기후변화가 문제가 제일 크다.”라고 짚었다. 국내적으로 봤을 때 그는 4대강 보 문제를 핵심으로 지적했다. 그는 “(4대강 보 논란은) 과학과 반과학의 싸움이라고 보는데, 우리가 이걸 해결하지 못한다면 더 중요한 기후위기 등 어떤 문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거다. 그 정도로 절박하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기자와 환경운동가의 차이에 대해서도 짚었다. 기자는 질문해서 답을 받아 기사만 쓰면 되지만, 환경운동을 통해서 성과를 거두려면 사람들을 엮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세상을 바꾸려면 전문가, 정치인, 언론, 시민, 지역주민을 엮어야 일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환경운동가는 네트워킹하는 게 가장 핵심”이라고 말했다.
지난 30년 동안 많은 환경운동가가 만들어졌다. 강찬수는 환경운동가의 각 세대에 따라 특징을 꼽았다. 그의 말을 요약하자면, 60~70대 환경운동가가 사람 중심으로 눈에 보이는 환경문제 해결에 집중했다면, 지금 40~50대 환경운동가는 여기에 자연생태 쪽으로 관심을 확장했다. 20~30대의 젊은 환경운동가는 기후 문제나 에너지 등 지구적 차원으로 환경운동의 영역을 더 넓게 본다는 특징이 있다. 강찬수는 젊은 세대 환경운동가들이 환경문제를 좀 더 친근하고 재밌게 접근하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라고 봤다. 그는 젊은 활동가들에게 “가슴은 따뜻하게, 머리는 차갑게, 발은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한다.”라고 말한다. 코로나19 등에 따라 웬만한 일을 비대면으로 해결하려는 게 현재의 추세라곤 하지만, 환경운동가는 사람을 직접 대면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문이다. 또 그는 전문성 증진에도 노력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누가 (제대로 된) 전문가이고 그 전문가가 제대로 보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게 그 이유였다.
끝으로 그는 환경운동연합에 대해 “기자로서, 회원으로서 30년을 계속 봐왔는데, 많은 시간 동안 어려움도 컸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제 환경운동의 외연을 넓히는데, 우리 사회 환경운동의 여전히 중심축으로 큰 역할을 해왔다.”라면서 “앞으로도 우리 사회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해나가 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글 | 이철재 에코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