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시를 품은 환경운동가, 이성근

“생긴 건 영판 산적 떨거지인데 속은 한없이 따시고 여리다. 멍게라 비유할까 했는데 멍게는 속이 따숩지 않아서 베렸다. 심성이 그러니 어쩌지 못하고 성결대로 마냥 어리석게 산다. 그러니까 그가 쓴 시가 좋을 수밖에 없다.”

구영기 전 생명그물 대표는 이성근 전 부산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현 부산 그린트러스트 상임이사, 이하 직책 생략)의 첫 시집 『바람이 되는 이유』(도선출판 전망) 작가 평에서 “저 우락부락 이가 시를 써?”라며 이렇게 말했다. 이성근의 따시고 여린 속에서 배태된 언어는 화려한 수사와 꾸밈을 절제한다. 핵발전소 문제를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면 족히 A4 너덧 장 분량도 모자랄 판에 스물다섯 줄 「효암리 멍텅구리」라는 제목의 시로 주민 울분과 고리 핵발전소 부조리를 그대로 드러낸 게 그였다. 그러니 독특할 수밖에.

 (사)걷고싶은부산 사무처장이자 전 부산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이성근 Ⓒ함께사는길 이성수


시인의 마음을 가진 이성근은 어떻게 환경운동을 시작하게 됐을까? 또 그가 지향하는 환경운동은 무슨 색깔일까? 사실 조금 들여다보면 환경운동가라고 해서 모두 같은 색은 아니다. 오히려 같은 색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할까. 생물 다양성처럼 여러 색깔이 섞여 있기에 환경운동은 시대에 맞게 변화할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제 이성근이 지닌 본시 색을 잠시 살펴보자. 


부정의의 시대, 세상을 향한 아우성

경남 의령이 고향인 이성근은 올해 예순하나다.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어릴 적 바다도 모르고 아이들의 최애 먹거리였던 자장면도 몰랐다. 그 시절 많이 허기졌지만, 그는 가난을 가난으로 인식하지 않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성근은 유년 시절 어머니 등에 업혀서 어머니가 소주 대병에 메뚜기를 잡아다 볶아주셨던 기억을 떠올렸다. 맑았던 유곡천도 빼놓을 수 없는 기억이지만, 하천엔 보가, 주변엔 축사가 들어서면서 망가지는 모습에 그는 “상당히 슬펐다.” 이웃 마을 가는 길 논 가장자리에 쌓여 있던 송사리 떼 주검이 아침 햇살에 빛나던 그 장면은 그에게 충격이었다. 농약 때문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망가진 유곡천과 송사리 떼죽음이 뭐가 대수냐 하겠지만, 그 시절 파고들기 시작한 성장과 개발 지상주의 특성과 맞닿아 있다. 돈벌이가 늘고 밥은 먹고 살 수 있었을지 몰라도 자연은 타자화되면서 사람과 단절됐다. 불행히도 그때의 모습이 현재의 문제로 이어졌다. 이성근은 이걸 되돌리는 운동을 30년 넘게 집중하고 있다. 그는 “운동가는 뭐 때문에 운동하나? 운동의 기저엔 뭔가 바꾸고 싶은 것들, 아끼는 것들이 있으니까 운동이 가능하지 않나 싶다.”라고 말한다.

성장주의에 기반한 자본은 자연의 각각의 속도를 획일화하고 무수한 곡선을 직선화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많은 걸 상실했다. 이성근은 “부산만 해도 많이 변했다. 그전만 해도 도시 블록과 블록 사이 바다가 보였는데, 지금은 한 곳만 남았다.”라면서 “경관 자원의 상실은 자연 자원의 상실”이라 짚었다. 예를 들어 부산의 산과 해안가 공간을 고층 빌딩이 점령하면서 바람길이 상실됐다. 예전 선풍기 1, 2단으로 견딜 수 있었던 더위는 이제 에어컨 없이 버티기 힘든 구조가 됐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성근은 우리 사회가 성장에 목메다 보니 다른 가치들은 “몰(沒) 됐다.”라고 본다. 성장에 따른 열매는 특정 소수에게 몰리지만, 피해는 불특정 다수에게 돌아가는 불평등한 구조가 지속되고 있다. 그 때문에 이성근은 환경운동의 핵심을 “제자리 찾기”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성근은 1남 3녀의 장남이자 장손이었다. 곤궁한 살림살이였기에 그는 살아오면서 이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꼈던 것 같다. 완고한 그의 부친과 적잖은 갈등도 있었다. 그의 시집엔 이런 내용과 그의 가족에게 경제적으로 가장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미안함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또 성장에 중독된 현대 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있다. 그는 부산이란 대도시에 살면서 시골과 도시에서 똑같이 신산한 삶이라도 도시가 더 ‘아수라’ 같을 수밖에 없다는 걸 지적했다(이성근의 시 「아수라」를 보라). 대학에서 불어를 전공했던 그는 대학 생활의 낭만보다 생존 문제에 대한 내적 우울과 마주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시절 그는 숱하게 집 부근 공동묘지에 올라 내면에서 올라오는 소리를 지르곤 했다. 그 때문에 ‘성근이 쟤 좀 맛이 갔나?’라는 친지들의 염려를 듣기도 했다. 남들은 잘 모르지만, 저물녘 그곳에서 만나는 쑥국새 소리와 한눈에 들어오는 부산 야경은 사색의 장소였다. 그에겐 이것이 우울함을 잠시 잊게 만드는 피안의 세계였을지도 모른다. 또 부정의한 세상을 향한 울분을 토하기에도 좋았다. 그를 분노케 했던 사건이 바로 5.18 광주 민주항쟁이었다. 1985년 출간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지하 세계의 베스트셀러’라고  불릴 정도로 5.18 광주 민주항쟁의 기록을 소상히 다뤘다. 유인물과 소문으로만 접했던 광주의 비극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하며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고 했다. 이 무렵 부산의 시인들이 ‘5·7문학협의회’를 결성했다. 이성근은 이 협의회 선배와 또래 문인들과 어울리면서 사회적 인식을 넓혀갔다. 이후 그는  지역의 이런저런 잡지사를 옮겨 다니다가 <맑은 세상>이란 잡지사 기자로 일했다. 1988년 초여름 경남 합천에 있는 ‘원자폭탄 피해자 진료소’를 취재하게 됐다. 이곳은 1945년 일본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중 합천 출신이 많아 일본 정부가 사죄의 뜻으로 건립했던 진료소였다. 이성근은 “피폭자들의 삶이 너무 비참했다. 특히 세대 간 이어지는 피폭자들의 고통과 사회적 무관심, 냉대, 방치된 모습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라고 회고했다. 그때부터 그는 핵이 도대체 뭔지 조사했다. 그때만 해도 핵 문제에 대해 아는 이가 많지 않았기에 그는 수소문 끝에 구자상(전 부산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을 만난다. 1958년생인 구자상은 이성근의 4년 선배로 1980년대 초중반부터 반공해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1990~2000년대 부산 지역 환경운동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두 사람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생태적 시선으로 우리 시대 상실을 기록하다

가덕도100년 숲 터줏대감나무 이름표 달기 운동을 진행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가덕도를 찾는 이성근 처장 Ⓒ이성근


이성근은 1990년부터 부산공추협에 적을 뒀다. 구자상이 낙동강과 에너지 문제에 초점을 뒀다면 이성근은 산과 강, 바다 등의 자연·생태 문제 해결에 중점을 뒀다. 그는 자신의 활동 원동력을 “호기심인 것 같다.”라고 말한다. 세상과 사안에 대한 호기심에 한번 문제를 파고들면 끝을 보고자 했다. 그에게 환경운동연합은 볼 수 없었던 곳을 보게 하고 새로운 시각을 훈련하게 하는 “세계의 창”이었다. 그 시절 그의 별명은 멧돼지다. 저돌적이었지만 치밀했다. 그 흔적은 여러 곳에 지금도 남아 있다. 예컨대 부산 다대포해수욕장엔 지금도 ‘다대포 매립 백지화 기념비’가 있다. 1990년대 초반과 2000년대 초반 두 번에 걸쳐 부두 건설을 위한 공유수면 매립이 추진됐다. 국책사업이었다. 이걸 지역 시민사회와 주민이 연대해 막아낸 결과물이 이 비석이다. 여기서 이성근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 2009년까지 부산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으로 활동했던 그는 이후 (사)걷고싶은부산 사무처장으로 환경운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 그는 부산의 바다, 강, 산을 잇는 길을 위해, 직접 거리를 재고 곳곳의 이정표 글귀를 작성했다. 그것이 ‘제주 올레길’과 함께 도보 여행객에서 인지도 높은 ‘부산 갈맷길’이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러한 성과를 통해 자부심과 함께 자신의 존재 의미를 느낀다고 했다.

성공한 운동 사례 못지않게 지난 시기 아쉬움도 컸다. 현실적으로 권력과 자본에 대항한 환경운동은 실패 사례가 많았다. 그는 ‘죽여버리겠다.’라는 위협보다 자본이나 개발업자의 농간에 원형이 상실되는 것과 사회적 약자의 고통이 더 아팠다. 그는 2018년 11월 13일 <인저리타임> 인터뷰에서 “연산동 석면 피해자가 터져 나오는 기침을 참지 못하고 뱉어내면서 보인 고통스러운 표정과 절규를 보면서 나의 아픔처럼 고통을 느꼈다. 신고리핵발전소 5·6호기 건설로 사라지고 없는 효암마을 잠수부 김모 씨의 호소는 잊을 수 없다.”라고 밝혔다. 

그는 최근 가덕도 신공항 문제를 언급하면서 “지금이 제일 힘든 것 같다. 환경운동의 고립과 단절이 더 심화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2년 전 환경운동연합 가덕도 생태조사위원회에 참여한 그는 현장 조사만 서른 번 넘게 다녔다. 여기에 신공항 건설 발표 이전부터 다녔던 발걸음을 보탠다면 그 횟수는 족히 수백 번이 넘는다. 이를 통해 가덕도가 우리나라에서 몇 군데 안 되는 숲이라는 걸 확인했다. 특히 공항 예정부지의 종 다양성과 역사 문화적 자산 등은 월등했다. 가덕도 신공항 반대 운동을 위해 그가 제안한 것이 ‘가덕도 백년 숲 지키기’였다. 그러나 가덕도 신공항 문제와 이 지역 숲 문제는 사회적으로 외면받고 있다는 것이 그의 느낌이다. 그는 “금정산은 부산 시민들에게 더 이상 건드려서는 안 되는 곳으로 각인돼 있는데, 금정산에 버금가는 뛰어난 가덕도를 제대로 알렸다면 시민들 생각이 달라졌을 것”이라 말했다. 그는 지역 시민단체 역할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다. 지역의 시민사회는 그 지역의 소금과 같은 존재여야 함에도 설탕에 길들여지면서 개발 우호적 관점이나 침묵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성근은 가덕도 문제가 그런 정서의 산물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지역에 뿌린 내린 단체는 지역 내 여러 관계에 따라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라면서 “그걸 경계하고 극복해야 한다. 나아가 시민운동, 기후생태 환경운동의 존재 이유와 본령을 되짚어 봐야한다.”라고 주문한다. 현재 그가 몸담은 부산그린트러스트는 녹지 관련 여러 스펙트럼 단체 중 야성이 가장 높은 활동을 보이고 있고, 이성근의 뚝심이 이를 견지하고 있다. 사실 이성근이 이제껏 활동할 수 있었던 근본적 원동력 중에는 “이게 옳은 일”이라는 신념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자본과 권력에 의해 생태적 지탱가능성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그는 생태적 가치, 미래 세대를 위해 저항했고,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공감했다. 

지난 30년 넘는 활동 속에서 이성근은 많은 경험을 해왔다. 그는 “선배 운동가는 다음 운동가 활동의 자양분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일정 정도 많은 서포트를 받아왔다. (후배 활동가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게 선배가 해야 할 일이다.” 그는 이후 두세 권의 시집 출간과 함께 가덕도 등 지역의 생태환경사를 정리할 생각이다. 예전에 뭐가 있었는지 기록을 해둬야 우리가 무엇을 상실했고, 또 이를 통해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있기에 말이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라 했던가. 생태철학에 기반을 둔 경험 많은 환경운동가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늘도 현장으로 달려간다. 


글 | 이철재 에코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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