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명균 안양군포의왕환경운동연합 의장 Ⓒ함께사는길 이성수
“저 안양천 똥물을 어떻게 살려요?”
1997년 10월 안양·군포·의왕환경운동연합(이하 안군의환경연합) 창립총회에 모인 300여 명의 표정은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창립선언문에서 안양천 살리기라는,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목표를 핵심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신도 불가능한 일은 시키지 않는데…,’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한 사람,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안명균 현 안군의환경연합 공동의장(이하 직책 생략)의 생각은 확고했다.
사실 당시만 해도 안양천은 전국에서 최악의 수질 상태 1, 2위를 다투던 하천이었다. 경기도 의왕시에서 발원해 서울 구로구, 영등포구를 거쳐 한강으로 유입되는 안양천은 1970년대부터 구로공단, 군포공단이 들어서며 인구가 몰렸지만, 하수 처리장 가동은 20여 년이 지난 1992년에야 이뤄졌다. 1986년 생물화학적산소요구량(BOD)은 136ppm이었고, 200ppm 가까이 이른 적도 있었다. 이 수치는 연평균 농도이기에 비가 오지 않는 갈수기엔 끔찍한 수준까지 치솟았다. 안명균은 “그 정도면 물이 흐르는 게 아니라 스멀스멀 기어가는 상태”라고 회상했다. 2021년 안양천 하류 연평균 BOD가 3.2 ppm인 것과 비교해보면 당시 상황을 가늠할 수 있다. 그 시절 안양천 바닥엔 공장 폐수에 포함된 중금속이 쌓였고, 떼죽음 당할 물고기조차 없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는 주거 환경뿐 아니라 삶의 질 자체를 떨어뜨렸다. 안양천은 그렇게 도심 속 거대한 흉물로 전락했다.
안명균은 안양천 36km 전 구간을 6번 걸으며 실태조사부터 했다. 하천 살리기 이론이야 대학교수와 전문가가 앞서겠지만, 현장 구석구석 상태가 어떤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그를 따를 수가 없었다. 1999년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안양천살리기네트워크를 구성한 안명균은 관련 전문가를 참여시키고, 안양천 유역 지자체를 찾아다니며 안양천 살리기 종합계획 수립을 촉구했다. 그는 “환경운동의 교훈 중 하나는 자기 얘기만 떠들어서는 절대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이라면서 “시민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내용 준비를 많이 해야 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안양천 여름 캠프, 청소년 자전거 대행진 등 시민 참여 행사를 통해 안양천 살리기의 중요성을 알려 나갔다. 이러한 노력으로 수질이 개선되고 새들과 물고기가 돌아오는 등 잃어버렸던 안양천의 자연성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서해에서 한강을 거쳐 올라오는 참게와 숭어까지 확인했다. 여름이면 안양천 지류에서 아이들의 멱 감는 소리까지 들렸다. 이렇게 안양천은 도심 하천 살리기의 성공적 모델로 평가받았다. 이런 활동으로 안양천살리기네트워크는 안양시와 함께 2009년 <SBS> ‘물환경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학생운동·노동운동 그리고 환경운동
안양천 살리기 운동은 ‘미친놈’ 소리마저 칭찬으로 여겼던 안명균이 뚝심으로 만든 성과였다. 인터뷰 동안 그는 ‘올곧게’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그런 그의 ‘올곧은 뚝심’은 어디서 왔을까? 1962년생, 올해 환갑을 맞은 안명균의 삶의 기록은 오늘의 그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알 수 있게 하지 않을까? 또 그 시대 환경운동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안명균은 초·중·고교 시절 ‘범생이’였다. 고등학교 선생님에게서 처음 얻어 마신 술과 두 번의 미팅이 ‘최고의 일탈’이라 말할 정도로 그는 부모님과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다. 원래 꿈은 의사였다. 대입 성적도 잘 나와 의대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6년 학비를 부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연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당시는 사회적으로 이공계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시기였기에, 그는 국내 대기업의 인재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졸업만 하면 자동적으로 군 복무 문제와 취업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그가 대학에 입학한 1981년은 박정희 유신체제가 붕괴하면서 민주화 요구가 높았던 ‘서울의 봄’ 직후였다. 너무나 짧은 서울의 봄 이후 전두환 신군부의 독재가 시작됐다. 잔디밭에 서너 명만 앉아도 뭔 일을 꾸미나 싶어 경찰이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강의실에선 교수가, 캠퍼스 곳곳과 도서관에선 학생들이 감시당했다. 군사 독재 규탄 시위를 해도 짧으면 15초, 길어봤자 1분 안에 잡혀갔다. “데모하는 데 근처도 안 가겠다.”라고 어머님께 약속까지 했던 안명균은 시대의 고통과 울분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학생운동에 깊게 참여하게 된 그는 학교를 휴학하고 공장에 취업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안정적으로 주류 기득권 사회에 편입할 수 있었던 게 그였다. 그는 기득권 기회를 스스로 내려놓고 치열한 변혁의 삶을 지향했다.
1987년 군 제대 후 안명균은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노동운동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겠다.”라는 게 당시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안양노동상담소 실장을 맡아 노동조합 결성을 지원했다. 그런데 1990년대 초·중반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현실 사회주의 몰락은 당시 변혁 운동진영의 지향점 상실로 이어졌다. 또 노동조합 간의 협의체와 연맹이 형성되는 등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서 노동상담소의 역할이 격감했다. 이 시기 그와 비슷한 운동 경력의 사람들은 전국노동자협의회(전노협, 현 민주노총 전신)와 같은 곳에서 상근 활동을 하거나 현실 정치 참여를 선택했다. 또 시민단체 활동에 참여하는 이들도 있었다. 안명균은 “정치를 바꿔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그의 동지들이 민주당 등 거대 정당으로 진출할 때 그는 노회찬 전 정의당 국회의원(2018년 작고)과 함께 진보정당추진위원회 활동을 이어갔다. 그렇다고 비전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기존의 운동방식으로는 세상을 제대로 바꿀 수 없다고 봤다. 때마침 환경운동연합 월간 <함께 사는 길>과 <녹색평론>을 접하게 됐고, ‘뭔가 다르다.’라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안명균은 주변 동료들과 함께 안군의환경연합을 창립했다. “노동조합이 제대로 환경운동에 나서게 하는 게 필요하다고 봤다.”라는 게 그의 말이다.
탈핵, 탈토건, 탈성장 사회로 나아가야
안명균은 안군의환경연합뿐 아니라 경기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환경운동연합 조직위원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그중 경기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한다. 2000년대 초반 경기도 인구는 600만~700만 명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1350만 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인구 과밀은 난개발과 과개발로 이어지면서 극심한 자연환경 파괴가 벌어졌다. 안명균이 “경기도만큼 싹 뒤집어서 개발한 데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경기도 난개발저지공동행동을 꾸려 대규모 개발 계획이 나올 때마다 싸움을 이어갔다. 안명균은 “한 지역의 경우 난개발 반대 대책위가 14개였다.”면서 “하루에 두 군 데씩만 해도 토, 일요일도 못 쉬고 돌아다녔다.”라고 말했다. 이후 수도권 과밀반대 전국연대가 만들어지고 이곳 집행위원장으로 맡았던 안명균은 “결국 하나도 결코 막은 게 없다. 겨우 하나 막아놓으면 나중에 더 나쁜 걸로 개발하는데, 그때 이제 환경운동 한다는 거에 회의가 들었다. 그게 제일 힘들었다.”라고 말했다.

지난 9월 24일 기후정의행진 집회에 참석한 안명균 의장 Ⓒ안명균
안명균이 느낀 회의와 좌절감은 그가 녹색당에 참여할 때 탈토건과 탈성장을 강조하게 된 이유였다. 여기에 그는 탈핵까지 포함해 ‘3탈’을 해야 한다고 봤다. 그는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고 이후 녹색당 창당 과정에 깊게 관여했다. 그는 “전 세계 녹색당은 집권이 목표가 아니라 연대를 통해 녹색당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라며 “내가 생각하는 녹색당의 가치가 바로 3탈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2014년 지방선거에 녹색당 의왕시의원 후보로 나선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안명균은 최근 환경운동연합 조직 전환 관련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과거에도 그렇지만 환경운동연합의 가장 든든한 기반은 지역 조직”이라면서 “중앙이 해야 할 역할 중에 제일 큰 건 새로운 방식의 일들을 찾아내고 그걸로 지역들에 도움을 주는 거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있던 틀을 확 부시는 게 아니고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라고 덧붙였다. 기후위기 관련해 그는 “녹색당이든 환경연합이든 일반 시민들이 ‘기후위기가 심각해. 근데 이걸 누구랑 상의해서 해결하지?’라고 할 때 떠오르는 세 군데 중에 한 군데는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면서 “‘쟤는 미쳤나 봐. 기후위기에 미쳤어’ 이런 소리를 듣는 한이 있어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직이 오래갈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안양군포의왕 시민햇빛발전 사회적 협동조합 이사장도 맡고 있는 안명균은 “최근에는 햇빛 때문에 산다.”라고 말했다. 10년 전 어렵게 시작한 햇빛발전소가 현재 7곳, 발전량 1300kW에 이르렀다. 덕분에 2년 전부터는 2명의 상근비를 줄 수 있는 상황에 도달했고, 새롭게 햇빛발전소 설립에 투자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겨났다. 사회적 협동조합은 출자해도 배당을 못 받는다. 수익은 공익적 활동에 쓰인다. 그는 “여기에 큰돈을 출자하는 사람은 정말 정신 나간 사람”이라면서 “그런데 정신 나간 사람들이 동네에 1000명이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기후위기 완화와 적응에 대한 시민 의식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과 풀뿌리 운동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어떤 이는 ‘미쳐야 미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안명균은 환경운동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그 운동에 미쳐야 한다는 걸 강조한다.
그는 경기도 내 29개 햇빛발전소를 50개로 늘려서, 여기서 발생한 수익으로 2명씩의 상근 활동가를 운영하는 체제를 구상하고 있다. 햇빛 발전에 미친 100명의 활동가가 있으면 세상을 제대로, 더 빨리 바꿀 수 있다는 게 그의 꿈이다.
글 | 이철재 에코큐레이터
안명균 안양군포의왕환경운동연합 의장 Ⓒ함께사는길 이성수
“저 안양천 똥물을 어떻게 살려요?”
1997년 10월 안양·군포·의왕환경운동연합(이하 안군의환경연합) 창립총회에 모인 300여 명의 표정은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창립선언문에서 안양천 살리기라는,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목표를 핵심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신도 불가능한 일은 시키지 않는데…,’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한 사람,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안명균 현 안군의환경연합 공동의장(이하 직책 생략)의 생각은 확고했다.
사실 당시만 해도 안양천은 전국에서 최악의 수질 상태 1, 2위를 다투던 하천이었다. 경기도 의왕시에서 발원해 서울 구로구, 영등포구를 거쳐 한강으로 유입되는 안양천은 1970년대부터 구로공단, 군포공단이 들어서며 인구가 몰렸지만, 하수 처리장 가동은 20여 년이 지난 1992년에야 이뤄졌다. 1986년 생물화학적산소요구량(BOD)은 136ppm이었고, 200ppm 가까이 이른 적도 있었다. 이 수치는 연평균 농도이기에 비가 오지 않는 갈수기엔 끔찍한 수준까지 치솟았다. 안명균은 “그 정도면 물이 흐르는 게 아니라 스멀스멀 기어가는 상태”라고 회상했다. 2021년 안양천 하류 연평균 BOD가 3.2 ppm인 것과 비교해보면 당시 상황을 가늠할 수 있다. 그 시절 안양천 바닥엔 공장 폐수에 포함된 중금속이 쌓였고, 떼죽음 당할 물고기조차 없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는 주거 환경뿐 아니라 삶의 질 자체를 떨어뜨렸다. 안양천은 그렇게 도심 속 거대한 흉물로 전락했다.
안명균은 안양천 36km 전 구간을 6번 걸으며 실태조사부터 했다. 하천 살리기 이론이야 대학교수와 전문가가 앞서겠지만, 현장 구석구석 상태가 어떤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그를 따를 수가 없었다. 1999년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안양천살리기네트워크를 구성한 안명균은 관련 전문가를 참여시키고, 안양천 유역 지자체를 찾아다니며 안양천 살리기 종합계획 수립을 촉구했다. 그는 “환경운동의 교훈 중 하나는 자기 얘기만 떠들어서는 절대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이라면서 “시민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내용 준비를 많이 해야 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안양천 여름 캠프, 청소년 자전거 대행진 등 시민 참여 행사를 통해 안양천 살리기의 중요성을 알려 나갔다. 이러한 노력으로 수질이 개선되고 새들과 물고기가 돌아오는 등 잃어버렸던 안양천의 자연성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서해에서 한강을 거쳐 올라오는 참게와 숭어까지 확인했다. 여름이면 안양천 지류에서 아이들의 멱 감는 소리까지 들렸다. 이렇게 안양천은 도심 하천 살리기의 성공적 모델로 평가받았다. 이런 활동으로 안양천살리기네트워크는 안양시와 함께 2009년 <SBS> ‘물환경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학생운동·노동운동 그리고 환경운동
안양천 살리기 운동은 ‘미친놈’ 소리마저 칭찬으로 여겼던 안명균이 뚝심으로 만든 성과였다. 인터뷰 동안 그는 ‘올곧게’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그런 그의 ‘올곧은 뚝심’은 어디서 왔을까? 1962년생, 올해 환갑을 맞은 안명균의 삶의 기록은 오늘의 그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알 수 있게 하지 않을까? 또 그 시대 환경운동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안명균은 초·중·고교 시절 ‘범생이’였다. 고등학교 선생님에게서 처음 얻어 마신 술과 두 번의 미팅이 ‘최고의 일탈’이라 말할 정도로 그는 부모님과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다. 원래 꿈은 의사였다. 대입 성적도 잘 나와 의대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6년 학비를 부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연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당시는 사회적으로 이공계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시기였기에, 그는 국내 대기업의 인재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졸업만 하면 자동적으로 군 복무 문제와 취업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그가 대학에 입학한 1981년은 박정희 유신체제가 붕괴하면서 민주화 요구가 높았던 ‘서울의 봄’ 직후였다. 너무나 짧은 서울의 봄 이후 전두환 신군부의 독재가 시작됐다. 잔디밭에 서너 명만 앉아도 뭔 일을 꾸미나 싶어 경찰이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강의실에선 교수가, 캠퍼스 곳곳과 도서관에선 학생들이 감시당했다. 군사 독재 규탄 시위를 해도 짧으면 15초, 길어봤자 1분 안에 잡혀갔다. “데모하는 데 근처도 안 가겠다.”라고 어머님께 약속까지 했던 안명균은 시대의 고통과 울분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학생운동에 깊게 참여하게 된 그는 학교를 휴학하고 공장에 취업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안정적으로 주류 기득권 사회에 편입할 수 있었던 게 그였다. 그는 기득권 기회를 스스로 내려놓고 치열한 변혁의 삶을 지향했다.
1987년 군 제대 후 안명균은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노동운동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겠다.”라는 게 당시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안양노동상담소 실장을 맡아 노동조합 결성을 지원했다. 그런데 1990년대 초·중반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현실 사회주의 몰락은 당시 변혁 운동진영의 지향점 상실로 이어졌다. 또 노동조합 간의 협의체와 연맹이 형성되는 등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서 노동상담소의 역할이 격감했다. 이 시기 그와 비슷한 운동 경력의 사람들은 전국노동자협의회(전노협, 현 민주노총 전신)와 같은 곳에서 상근 활동을 하거나 현실 정치 참여를 선택했다. 또 시민단체 활동에 참여하는 이들도 있었다. 안명균은 “정치를 바꿔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그의 동지들이 민주당 등 거대 정당으로 진출할 때 그는 노회찬 전 정의당 국회의원(2018년 작고)과 함께 진보정당추진위원회 활동을 이어갔다. 그렇다고 비전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기존의 운동방식으로는 세상을 제대로 바꿀 수 없다고 봤다. 때마침 환경운동연합 월간 <함께 사는 길>과 <녹색평론>을 접하게 됐고, ‘뭔가 다르다.’라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안명균은 주변 동료들과 함께 안군의환경연합을 창립했다. “노동조합이 제대로 환경운동에 나서게 하는 게 필요하다고 봤다.”라는 게 그의 말이다.
탈핵, 탈토건, 탈성장 사회로 나아가야
안명균은 안군의환경연합뿐 아니라 경기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환경운동연합 조직위원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그중 경기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한다. 2000년대 초반 경기도 인구는 600만~700만 명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1350만 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인구 과밀은 난개발과 과개발로 이어지면서 극심한 자연환경 파괴가 벌어졌다. 안명균이 “경기도만큼 싹 뒤집어서 개발한 데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경기도 난개발저지공동행동을 꾸려 대규모 개발 계획이 나올 때마다 싸움을 이어갔다. 안명균은 “한 지역의 경우 난개발 반대 대책위가 14개였다.”면서 “하루에 두 군 데씩만 해도 토, 일요일도 못 쉬고 돌아다녔다.”라고 말했다. 이후 수도권 과밀반대 전국연대가 만들어지고 이곳 집행위원장으로 맡았던 안명균은 “결국 하나도 결코 막은 게 없다. 겨우 하나 막아놓으면 나중에 더 나쁜 걸로 개발하는데, 그때 이제 환경운동 한다는 거에 회의가 들었다. 그게 제일 힘들었다.”라고 말했다.
지난 9월 24일 기후정의행진 집회에 참석한 안명균 의장 Ⓒ안명균
안명균이 느낀 회의와 좌절감은 그가 녹색당에 참여할 때 탈토건과 탈성장을 강조하게 된 이유였다. 여기에 그는 탈핵까지 포함해 ‘3탈’을 해야 한다고 봤다. 그는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고 이후 녹색당 창당 과정에 깊게 관여했다. 그는 “전 세계 녹색당은 집권이 목표가 아니라 연대를 통해 녹색당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라며 “내가 생각하는 녹색당의 가치가 바로 3탈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2014년 지방선거에 녹색당 의왕시의원 후보로 나선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안명균은 최근 환경운동연합 조직 전환 관련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과거에도 그렇지만 환경운동연합의 가장 든든한 기반은 지역 조직”이라면서 “중앙이 해야 할 역할 중에 제일 큰 건 새로운 방식의 일들을 찾아내고 그걸로 지역들에 도움을 주는 거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있던 틀을 확 부시는 게 아니고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라고 덧붙였다. 기후위기 관련해 그는 “녹색당이든 환경연합이든 일반 시민들이 ‘기후위기가 심각해. 근데 이걸 누구랑 상의해서 해결하지?’라고 할 때 떠오르는 세 군데 중에 한 군데는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면서 “‘쟤는 미쳤나 봐. 기후위기에 미쳤어’ 이런 소리를 듣는 한이 있어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직이 오래갈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안양군포의왕 시민햇빛발전 사회적 협동조합 이사장도 맡고 있는 안명균은 “최근에는 햇빛 때문에 산다.”라고 말했다. 10년 전 어렵게 시작한 햇빛발전소가 현재 7곳, 발전량 1300kW에 이르렀다. 덕분에 2년 전부터는 2명의 상근비를 줄 수 있는 상황에 도달했고, 새롭게 햇빛발전소 설립에 투자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겨났다. 사회적 협동조합은 출자해도 배당을 못 받는다. 수익은 공익적 활동에 쓰인다. 그는 “여기에 큰돈을 출자하는 사람은 정말 정신 나간 사람”이라면서 “그런데 정신 나간 사람들이 동네에 1000명이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기후위기 완화와 적응에 대한 시민 의식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과 풀뿌리 운동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어떤 이는 ‘미쳐야 미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안명균은 환경운동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그 운동에 미쳐야 한다는 걸 강조한다.
그는 경기도 내 29개 햇빛발전소를 50개로 늘려서, 여기서 발생한 수익으로 2명씩의 상근 활동가를 운영하는 체제를 구상하고 있다. 햇빛 발전에 미친 100명의 활동가가 있으면 세상을 제대로, 더 빨리 바꿀 수 있다는 게 그의 꿈이다.
글 | 이철재 에코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