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인간다운 세상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한다.”

1957년생, 올해 우리 나이로 66세의 전 광주환경운동연합 임낙평 의장(이하 직책 생략)은 우리나라 환경 운동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사다. 그는 환경운동가 1세대로서 현 박미경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목포녹색연구회를 창립한 고 서한태 박사와 함께 호남권 환경운동을 대표해 왔다. 1970~1980년대 학생운동과 민주화 운동으로 시작된 임낙평의 변혁의 삶은 1980년대 말부터 환경운동가로서 전환의 삶을 추구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광주환경운동연합 회의실에서 두어 시간 진행된 인터뷰 동안 임낙평은 차분한 어조로 지난 삶을 회고했다. 그의 삶에선 현대사와 환경 운동사의 굵직한 장면들이 쏟아졌고, 현장 운동 경험과 이론을 겸비한 그는 열정과 냉정 사이 균형감 있는 평가와 전망을 이어갔다. 여전히 “현장 운동을 하고 싶다.”라는 그는 때때로 “자연과 전쟁하는 놈들은 가만두면 안 돼”라는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전 광주환경운동연합 임낙평 의장 ⓒ함께사는길 이성수


사회 모순을 개혁하기 위해 참여한 ‘들불야학’

임낙평은 1960~1970년대 어릴 적 그의 고향 해남의 모습을 “(현재) 라오스 농촌 풍경과 비슷했다.”라고 떠올렸다. 먹을 게 없어 미국 원조 밀가루와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았던 시절이었다. 임낙평의 가족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신산한 삶 속에서 7남매와 조부, 동생 등 대가족을 건사하면서도 자식들 교육을 최우선으로 했던 게 그의 부모였다. 임낙평은 어려운 시절을 살아냈던 부모님에 대한 존경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다. 그와 비슷한 연배의 환경운동가는 유년기 가난했던 시골에서 한국적 공동체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기억에 대해 임낙평이 “내 삶의 한 뿌리”라고 말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 싶다.

1978년 대학에 입학한 임낙평은 독문학을 전공했다. 그는 졸업 후 공부를 더 할 생각이었지만, 정치·경제·사회적 불합리와 모순적으로 중첩되는 당시 대한민국 구조 속에서 그의 눈에 전공과목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비슷한 고민의 선배, 동기들과 시대적 우울의 원인을 자각하고 1학년부터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청년 시절부터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목소리를 내고자 했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당시 군사정권이 과거 친일 잔재 세력과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의 학생운동은 또 다른 의미의 독립운동이었는지도 모른다.

임낙평은 학생운동의 하나인 야학 운동에 전념했다. 그가 참여한 노동야학이 바로 ‘들불야학’이었다. 들불야학은 1980년 5.18 광주항쟁 당시 초기부터 참여해 계엄군에 맞선 시민 지도부 등 책임 위치를 형성한 운동 조직이었다. 이 때문에 5.18 광주항쟁을 전후해 많은 열사와 구속자가 나왔다. 임낙평은 당시 외부로 피신 나와 있어서 화를 면했다. 그는 5.18 항쟁 정신 계승과 진실 알리기 등 이후 운동 과제를 살아남은 들불야학 멤버로서 “내 일”이라고 인식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엄혹한 통치 상황에서 임낙평은 5.18 광주항쟁의 의미와 신군부의 만행을 알리는 학내 시위를 전국에서 처음으로 조직했다. 그는 이 시위로 구속됐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 대학으로 5.18 광주항쟁의 진실을 요구하는 시위가 번져갔다.

2년 2개월여 옥고를 치른 후 임낙평은 대학에 복학해 졸업했다. 이즈음 그와 동료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는 “길이 딱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라면서도 “그런데 야학 운동을 할 때 우리의 큰 원칙은 ‘민중과 함께한다’는 거였다.”라고 회고했다. 그에 따라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현장으로 바로 뛰어드는 동지들이 있었다. 그러나 임낙평은 조금 달랐다. 그는 더욱 본질적인 운동적 삶을 위해 세상을 새롭게 학습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민주화 운동에서 환경운동으로 

임낙평은 국가와 경제 발전에 과학기술이 동반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은 현실을 직시했다. 우리보다 산업화를 먼저 이루었던 나라들은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불평등한 구조도 확인했다. 과학기술이 문명을 만들지만, 인간성을 상실한 과학기술은 더 큰 문제를 초래했다. 대표적으로 핵 문제가 그러했다. 이런 그의 인식 확장은 자연스럽게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최열을 알게 했다. 때마침 그의 고향인 해남에 핵폐기물 처분장을 만든다는 언론 기사가 나왔다. 1986년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사건으로 핵의 치명적 위험성이 알려졌지만, 당시 정부는 핵발전소와 핵폐기장 등 국가주의와 성장제일주의 관점의 과학기술정책을 강행하고 있었다.

임낙평은 노동운동, 농민운동도 필요하지만, 무분별한 개발과 성장을 추구하면서 발생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환경운동이 절실하다고 봤고, 서구에 비해 한참 늦었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라 그는 1988년부터 1년여를 준비해 이듬해 ‘광주환경공해연구회’를 창립했다. 이어 1992년 초엔 ‘광주전남환경운동시민연합’으로 단체 명칭을 변경했다. ‘공해추방’, ‘반공해’ 등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명확했던 시기에 ‘환경’, ‘시민’이 들어간 단체 명칭은 책임 소재의 모호성 논란에 따라 개혁 진영 내에서 개량주의 운동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환경이냐. 환경이 밥 먹여 주냐?”라는 비토의 목소리도 있었다. 이에 대해 임낙평은 “운동의 대중적 확산을 위해서는 무슨 무슨 투쟁, 추방과 같은 강한 표현보다 근본적이면서도 부드러운 접근이 더 유리하다.”라고 봤다. 그는 1992년 6월 리우환경회의를 통해서 이러한 시각이 전 세계적인 흐름이라는 걸 확인했다. 당시 서구 시민사회 단체는 기후위기와 생물종다양성 등 지구적 관점의 환경운동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UN이 대규모 국제회의에 각국 정부와 함께 NGO를 초청했다는 점에서 시민사회 운동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임낙평은 “우선 시야가 넓어지고 환경운동의 미션과 비전을 새롭게 정립하고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됐다.”라고 리우환경회의 참가 소감을 평가했다. 그가 2002년, 2012년 리우 플러스 10, 리우 플러스 20회의에 계속 참석한 것도 이러한 국제적 운동 흐름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1990년대 국내외의 흐름은 환경운동을 활성화하는 기회로 작용했다. 기회가 열렸다고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해야 할 일을 미루면 변화는 더디거나 중단되기 마련이다. 이 시기 임낙평을 비롯한 환경운동가들은 성장의 환상 속에 가려졌던 환경 파괴의 민낯을 드러내는 활동을 펼치면서 정부와 관계기관에 대책을 요구했다. 이를 통해 시민환경단체가 사회 발전의 파트너라는 인식을 더디지만, 국가와 시민들에게 인식시켰다. 여기에 언론이 이전 시기보다 환경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루면서 환경운동의 영역은 확대했고, 그에 따라 환경단체들도 속속 만들어졌다. 이런 상황에 대해 임낙평은 “일방적인 경제성장을 추구했던 한국 사회의 모순 구조가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이라 분석했다.



좌부터 박미경 환경운동연합 대표, 김종필 생태도시국장, 임낙평 전 의장, 이경희 사무처장


조직, 비전, 액션이 유기적으로 결합한 운동으로

임낙평이 지금까지 운동적 삶을 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학생운동 시절부터 새겨왔던 ‘To Be Human’, 즉 ‘인간화’를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인간다운 세상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To Be Human’은 교육사상가 파울로 프레이리가 『페다고지』라는 책에서 주창한 개념으로, 프레이리는 교육의 본질을 ‘인간성 회복’, ‘인간해방’으로 봤다. 임낙평이 말하는 인간화는 ‘인간 중심주의(anthropocentrism)’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 중심주의라는 지배적 패러다임에 저항과 비틀기를 통해 환경 중심주의 전환을 추구했다.

 임낙평은 지구적 환경위기는 여전하다는 점에서 환경운동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한국의 경제 수준은 세계 10위권이지만, 객관적인 환경 지표는 꼴찌 그룹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연과 환경을 파괴해서 얻은 소득이 중심이 된 GDP 가지고 몇만 달러니 경제 가치로 표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라면서 “우리가 환경을 위해 열심히 운동했지만, 아직도 파괴의 힘이 더 큰 상태”라고 말했다. 

이를 개선 하기 위해서는 환경운동의 힘을 키워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지만 “조직과 내용 그리고 이슈 파이팅 측면에서 과거보다 환경운동의 영향력이 감소한 것 같다.”라는 것이 임낙평의 말이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복합적 요인이 있을 것”이라면서 “주관적 관점에서 환경운동이 새로운 사회 변화에 부응하는 운동 구조를 만들지 못했다.”라는 점을 꼽았다. 지난 지방선거 때 이슈화된 김포 공항 이전, 제주 해저터널 등 민주당발 대형 개발 공약을 두고 그는 “대한민국 땅이 이재명 땅이여? 저 땅이 지 땅이여?”라고 분개하면서 “여야를 떠나서 단호하게 대응할 때는 단호해야 했다.”라며 환경단체 활동에 아쉬움도 드러내기도 했다. 가덕도 신공항 대응 환경운동에 대해서도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임낙평은 환경운동 활성화를 위해 “조직, 미션, 액션”이란 세 가지 원칙을 강조한다.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구조가 조직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철학이 명확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정립된 조직과 철학을 바탕으로 적극적이고 다양한 활동, 즉 액션이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제대로 된 운동단체가 될 수 있다는 시각이다. 

임낙평은 “인생이나 노동은 기쁨이 있어야 한다. 조직을 운영하는 데 재미를 만들고 하는 것도 하나의 기술이고 조직 운영 방법의 하나”라면서 “(지난 시기) 재밌게 일을 해왔다.”라고 말했다. 누가 가라고 하지 않았던 초행길을 간다는 것은 수많은 고뇌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길을 만들면서 지구를 위한 전환을 꿈꾸는 것이 임낙평의 삶이었고, 그 삶은 계속 이어진다. 


| 이철재 에코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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