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울산환경연합 김장용 공동의장, 더 크고 튼튼한 울타리를 꿈꾸다

이철재 에코큐레이터 naldorae@gmail.com


김장용 울산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함께사는길 이성수

“너희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책임은 내가 질게.” 작은 체구지만 목소리엔 힘이 실렸다. 1990년대 초반 울산공해추방운동연합(울산공추련) 회원에 가입한 이후 적극적인 회원 활동가를 거쳐 울산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장용 의장은 ‘환경운동의 울타리’ 역할을 자임한다. 그래서 운동할 때 발생하는 큰 책임은 자신이 질 테니 활동가는 직장인이 아닌 환경운동가답게 자신 있게 운동하라고 주문한다. 그것이 “단체 대표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1962년생, 올해 환갑인 김 의장의 본업은 음향과 영상 설비 설치사업이다. 그를 만난 곳도 한창 새로운 장비를 들여와 조율하고 있는 울산 ‘정토사’였다. 3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환경운동에 대한 따뜻한 조언 그리고 날카로운 진단을 함께 보여줬다. 


세 번의 죽을 고비에서 얻은 깨달음

경주에서 태어난 김 의장은 부친의 일자리를 따라 여섯 살 때 당시 울주군(현재 울산시) 온양읍 남창리로 왔다. 과수단지였던 마을에서 그는 연 날리며 할머니와 재밌게 놀았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첫 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일곱 살 무렵 그는 척추결핵을 앓았다. 당시를 그는 “밤이 두려웠던 때”라고 회고했다. 저승사자를 따라 부윰한 공간을 끝도 없이 걷다 깨기를 무수히 되풀이했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났지만, 척추결핵 후유증으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됐다. 동네 형들과 멱감고 놀다 모두 익사할 위기에서 혼자 살아남은 일도 있었고, 고모 집에 갔다가 연탄가스에 사경을 헤맨 적도 있었다. 그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후 김 의장에게 삶과 죽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죽음이 멀리 있다고 생각을 안 하니까 뭔가 부딪혀야 할 일이 있으면 남들만큼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라고 말했다. 환경운동에 뛰어들어 과감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 의장은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유별났다. 중고교 때부터 전자기기에 관심이 많았고 실제 친구네 집 망가진 라디오나 전축을 고쳐주곤 했다. 동네 아이들 과외로 용돈을 벌면 부산 헌책방과 미군 부대 주변을 쏘다니며 관련 책을 사봤다. 부산에서 서울 용산까지 왕복 20시간 걸리는 비둘기 완행열차를 타고서 청계천 헌책방도 뒤져 일본 전문서적도 찾아 사봤다. 그려진 회로판만 보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그가 독학으로 키운 실력은 대단했다. 1980년대 컬러TV 보급이 일반화되기 시작했고, 곧 VTR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친구와 함께 전자제품 서비스센터의 기사를 양성하는 대기업 직업훈련소에 들어갔다. 자비로 전문서적과 자료를 복사해 가며 공부했다. 덕분에 2년 뒤엔 울산에 서비스 전문점을 낼 수 있을 만큼 실적과 신망을 쌓았고, 못 고치는 게 없는 사람이란 소리를 듣게 됐다.

잘 나가던 그의 인생에 브레이크를 거는 사건이 발생했다. 건널목 부근에서 급히 밀고 들어오는 택시를 피하다가 사람을 쳤다. 지금 같으면 CCTV, 차량용 블랙박스 등으로 사고의 시시비비와 책임 소재를 가려낼 수 있었지만, 그게 없었던 당시 그가 모든 민형사상의 책임을 졌다. 사고를 피하려다 사고를 내고 그 때문에 감내해야 했던 억울함 때문에 그는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그걸 극복할 수 있게 도운 이들이 함께 환경운동을 하던 동지들이었다. 그는 활동을 통해 인생의 슬럼프를 극복하고 환경운동가로서 더욱 단단하게 설 수 있었다.


환경운동의 아이디어 뱅크

김 의장이 사는 울산은 1962년 우리나라 최초의 공업기지로 선정된 곳이다. 경제 성장을 위해 인권과 환경이 극단적으로 무시되던 군사독재기의 울산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공해병인 ‘온산병’ 발생 지역이었다. 공단이 들어서기 전만 해도 울산 앞바다는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고, 거기에 태화강의 민물이 섞이는 기수역 연해로서 천혜의 어장이었다. 지금은 매립돼 육지가 된 연자도 부근은 고래가 새끼를 낳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공단이 조성되면서 자연의 혜택은 사라졌고 주민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온산 지역 공해 피해 주민들은 대토를 받아 이주했지만, 비철금속 공장입지 등을 둘러싼 싸움은 끊이지 않았다. 한기양 목사가 이끄는 울산공추련은 1991년 정식 창립 이전인 1989년부터 이산화타이타늄 공장 저지를 위한 농성을 벌이는 등 치열한 싸움을 벌이면서 울산의 대표적 환경단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당시 김 의장이 살던 마을은 공해 피해지역으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봄만 되면 메틸 메르캅탄이라는 악취물질이 날아와 주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어떻게 할 방법을 모른 체 분노만 키우던 그 시기에 그는 울산공추련의 활동상에 대해 알게 되자 한걸음에 달려가 말했다. “회원이 되게 해주세요.”

김 의장이 회원을 넘어 회원 활동가로서 울산공추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최예용, 그 녀석이 아주 원수다, 원수. 내가 내 사업을 못 해, 그 녀석 때문에.”라며 웃는다. 웃으며 징글징글하다고 말할 정도로 최예용 현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과 막역하다. 1990년대 초반 서울에서 내려온 최예용은 김 의장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김 의장은 행동 없이 말만 번지르르한 서울 사람 스타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자기가 서울에서 왔는데 온산공단을 3일 동안 걸었다고 하더라고. 거기에 혹했다.”라는 게 김장용의 회고다. 

2005년 그린피스대원들과 함께 울산포경반대 퍼포먼스에 참가한 김장용 의장(오른쪽에서 6번째) Ⓒ함께사는길 이성수

죽이 맞은 두 사람은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그때부터 어느 게 직업인지 모를 정도로 완전히 미쳐서” 돌아다녔다. 퇴근 후 울산공추련 사무실 가서 최예용과 둘이서 소식지에 넣을 온산공단 사진 작업과 신문 스크랩부터 했다. 손은 바쁘게 놀리면서 입으로는 조직의 현황과 해결 방안, 환경운동을 하는 삶을 어떻게 꾸려야 할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김 의장이 여러 아이디어를 내고 최예용이 현장 활동에 적용하는 이인삼각의 활동을 이어갔다. 김장용은 상근자가 부족한 단체 활동력 강화를 위해 정책환경위원회, 노동환경위원회, 교육환경위원회 등 회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7~8개의 위원회 구조를 제안했다. 

그는 또 그는 공단지역에서 항상 일어나는 환경 문제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공해감시단 구성을 제안했다. 그가 활동의 모델로 삼은 것은 환경 파괴에 맞서 거친 액션을 펼치는 그린피스(Green Peace)의 활동이었다. 그런 활동을 하려면 환경운동가는 각종 측정 장비와 커뮤니케이션 장비 등 도구를 잘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울산환경운동연합 사무실에 안테나를 세우고 무선 햄(HAM)을 달아 감시단 차량과 연결하게 했다. 당시로서는 최첨단 민간 감시단이었다. 최예용이 울산에서 서울의 중앙사무처로 복귀한 후 김 의장이 환경감시단 연구팀장을 맡았다. 환경감시단 활동이 성과를 내면서 이후 생겨난 지역 환경단체들 역시 감시단 구조를 따라 했다. 그는 대구, 부산, 마산·창원 등 타 공단지역 환경감시단 구성 지원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일이 아닌 자기 세계를 펼치는 게 환경운동

본업을 제쳐두고 환경운동에 매진하는 그를 집안에서, 특히 부친이 뜯어말렸지만 그는 의지를 꺾지 않았고 헌신을 거듭했다. ‘워커홀릭’이란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환경운동에 참여했다. “그때는 하루라도 공단 감시활동을 안 하면 마치 숙제를  안 한 거 같아 매일 빠지지 않고 밤늦도록 공단을 돌았다. 거의 중독 수준이었다.” 반공해운동에 대한 고도의 긴장과 집중력은 활동의 성과로 나타났지만 그의 내면에 꼭 건강한 영향만 끼친 건 아니었다. 

생명에 위해를 끼치는 건 과오라는 생각에 집착했다. 풀 한 포기조차 밟는 게 미안해 흙과 돌만 밟고 걷으려 했고 육식을 안 하는 건 물론 채식 또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인간의 폭력으로 느껴졌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을 겨우 목에 넘기는 정도로만 먹었다. 칼날처럼 곤두선 의식과 쇠약해진 몸을 하고도 그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풀 베고 난 자리에서 밀려오는 냄새가 마치 피비린내처럼 강렬할 정도로 몸과 맘이 약해지고 그만큼 예민해졌다. 결국 몸이 그에게 마음을 바꾸라고 요구했다.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성찰을 통해 그는 “운동이라는 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데 내가 편협한데 남에게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나.”라는 성찰에 이르렀다. “중용을 하자”라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에게 중용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자 최대한 채우려는 노력이다. 그가 채우려는 건 통찰하는 힘이다. 무신론자였던 그는 중년에 일로 찾은 사찰에서 부처님의 연기법(緣起法)에 관한 공부를 접하고 수용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어지면 이것도 없어지는 서로 연결된 세상이라는 말씀은 생태주의 사상과 맥을 같이했다. 

지난 30년 환경운동에 참여하면서 김 의장은 울산 고래대사관 설립을 주도하는 등 크고 작은 성과를 만들어냈다. 최예용 소장과 함께 환경운동연합 바다위원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해양쓰레기 투기 금지 등 제도적 개선도 이루어냈다. 30여 년의 활동 속에서 김 의장이 체득한 것은 “결국 운동은 사람이 한다.”는 것이다. 활동가들이 오래 버티지 못하는 상황, 다시 말해 운동할 사람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황이 바로 운동의 위기라고 그는 짚었다. “인걸은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끼고 있다. 이게 불편한 진실이다.” 그의 진단이 뼈아프다. 김 의장은 젊은 활동가들에게 “일하러 오는 게 아니라 자기 세계를 펼치러 오는 것”이라 강조한다. 활동가들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중시하고 존중해야 운동이 잘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활동가들이 질 짐이 따로 있겠지만 힘든 거는 내가 진다. 내가 울타리 역할을 하겠다.” 작은 몸이지만 ‘내가 울타리가 될 테니 후배들은 자기 세계를 펼치는 활동을 하라.’는 그의 말이 거인의 음성처럼 묵직하게 울렸다.  


주간 인기글





03039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 23
TEL.02-735-7088 | FAX.02-730-1240
인터넷신문등록번호: 서울 아03915 | 발행일자 1993.07.01
발행·편집인 박현철 | 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현철


월간 함께사는길 × 
서울환경연합